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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ww.Bitinfo.KR] 성씨정보 홈 > 교육/한자 > 중급 한자 > 소학(小學)  

소학
(小學)

입교
(立敎)
第一

명륜
(明倫)
第二

경신
(敬身)
第三

계고
(稽古)
第四

가언
(嘉言)
第五

선행
(善行)
第六

 

< 선행 善行 第六 >

 

001 呂滎公名希哲, 字原明. 申國正獻公之長子. 正獻公居家, 簡重寡黙, 不以事物經心, 而申國夫人, 性嚴有法度, 雖甚愛公, 然, 敎公, 事事循蹈規矩. 甫十歲, 祁寒暑雨, 侍立終日, 不命之坐, 不敢坐也. 日必冠帶, 以見長者, 平居雖甚熱, 在父母長者之側, 不得去巾襪縳袴, 衣服唯謹. 行步出入, 無得入茶肆酒肆, 市井里巷之語, 鄭衛之音, 未嘗一經於耳, 不正之書, 非禮之色, 未嘗一接於目. 正獻公通判潁州, 歐陽公適知州事. 焦先生千之伯强, 客文忠公所, 嚴毅方正, 正獻公招延之, 使敎諸子. 諸生小有過差, 先生端坐, 召與相對, 終日竟夕, 不與之語, 諸生恐懼畏伏, 先生方略降辭色. 時公方十餘歲. 內則正獻公與申國夫人敎訓, 如此之嚴, 外則焦先生化導, 如此之篤. 故公德器成就, 大異衆人. 公嘗言, 人生內無賢父兄, 外無嚴師友, 而能成者, 少矣.

002 呂滎公長夫人, 待制諱昷之之幼女也. 最鍾愛, 然, 居常至微細事, 敎之必有法度. 如飮食之類, 飯羹許更益, 魚肉不更進也. 時張公已爲待制河北都轉運使矣. 及夫人嫁呂氏, 夫人之母, 申國夫人姊也. 一日來視女. 見舍後有鍋釜之類, 大不樂, 謂申國夫人曰, 豈可使小兒輩私作飮食, 壞家法耶. 其嚴如此.

003 康陽城爲國子司業, 引諸生告之曰, 凡學者, 所以學爲忠與孝也. 諸生有久不省親者乎. 明日謁城還養者, 二十輩. 有三年不歸侍者, 斥之.

004 安定先生胡瑗, 字翼之. 患隋唐以來, 仕進尙文辭而遺經業, 苟趨祿利. 及爲蘇湖二州敎授, 嚴條約, 以身先之, 雖大暑, 必公服終日, 以見諸生, 嚴師弟子之禮, 解經至有要義, 懇懇爲諸生, 言其所以治己, 而後治乎人者. 學徒千數. 日月刮劘, 爲文章, 皆傅經義, 必以理勝, 信其師說, 敦尙行實. 後爲太學, 四方歸之. 庠舍不能容. 其在湖學, 置經義齋治事齋. 經義齋者, 擇疏通有器局者居之, 治事齋者, 人各治一事, 又兼一事. 如治民治兵水利算數之類. 其在太學亦然. 其弟子散在四方, 隨其人賢愚, 皆循循雅飭. 其言談擧止, 遇之不問可知爲先生弟子. 其學者, 相語稱先生, 不問可知爲胡公也.

005 明道先生言於朝曰, 治天下, 以正風俗得賢才, 爲本. 宜先禮命近侍賢儒及百執事, 悉心推訪, 有德業充備足爲師表者, 其次有篤志好學材良行修者, 延聘敦遺, 萃於京師, 俾朝夕相與-講明正學. 其道必本於人倫, 明乎物理, 其敎自小學灑掃應對以往, 脩其孝悌忠信, 周旋禮樂. 其所以誘掖激勵漸摩成就之道, 皆有節序. 其要在於擇善脩身, 至於化成天下, 自鄕人而可至於聖人之道. 其學行皆中於是者, 爲成德. 取材識明達可進於善者, 使日受其業, 擇其學明德尊者, 爲太學之師, 次以分敎天下之學. 擇士入學, 縣升之州, 州賓興於太學, 太學聚而敎之, 歲論其賢者能者於朝. 凡選士之法, 皆以性行端潔, 居家孝悌, 有廉恥禮讓, 通明學業, 曉達治道者.

006 伊川先生看詳學制. 大槪以爲學校, 禮義相先之地, 而月使之爭, 殊非敎養之道. 請改試爲課, 有所未至, 則學官召而敎之, 更不考定高下. 制尊賢堂, 以延天下道德之士, 鐫解額, 以去利誘, 省繁文, 以專委任, 勵行檢, 以厚風敎, 及置待賓吏師齋, 立觀光法. 如是者, 亦數十條.

007 藍田呂氏鄕約曰, 凡同約者, 德業相勸. 過失相規. 禮俗相交. 患難相恤. 有善則書于籍, 有過若違約者, 亦書之, 三犯而行罰, 不悛者絶之.

008 明道先生敎人. 自致知至於知止, 誠意至於平天下, 灑掃應對至於窮理盡性, 循循有序. 病世之學者, 捨近而趨遠, 處不而闚高. 所以輕自大而卒無得也. 右, 實立敎.

009 江革少失父, 獨如母居. 遭天下亂, 盜賊並起, 革負母逃難, 備經險阻, 常採拾以爲養. 數遇賊, 或劫欲將去. 革輒悌泣求哀, 言有老母. 辭氣愿款, 有足感動人者. 賊以是不忍犯之, 或乃指避兵之方. 遂得俱全於難. 轉客下邳, 貧窮裸跣, 行傭以供母, 便身之物莫不畢給.

010 薛包好學篤行. 父娶後妻而憎包, 分出之, 包日夜號泣不能去. 至被毆杖, 不得已廬于舍外, 旦入而灑掃, 父怒, 又逐之, 乃廬於里門, 晨昏不廢. 績歲餘父母慚而還之. 後服喪過哀.
    旣而弟子, 求分財異居, 包不能止, 乃中分其財, 奴婢引其老者曰, 與我共事久. 若不能使也. 田廬取其荒頓者曰, 吾少時所理. 意所戀也. 器物取其朽敗者曰, 我素所服食. 身口所安也. 弟子數破其産. 輒復賑給.
       설포는 학문을 좋아하고 행실을 독실하게 하였다. 아버지가 후처를 맞아들이고는 설포를 미워하여 분가시켜 내보내니, 설포는 밤낮으로 부르짖고 눈물을 흘리며 차마 떠나지를 못하였다. 몽둥이로 매를 맞게 되어서야, 마지 못해 집 밖에서 여막생활을 하였는데, 아침마다 들어가서 물뿌리고 청소하였다. 아버지가 노여워하여 또 내쫓으니, 이에 마을 어귀에서 여막생활을 하면서, 아침 저녁 문안을 그치지 않았다. 1년 남짓 되어 부모가 자신들의 행실을 반성하고 설포를 집으로 돌아오게 하였다. 뒤에 부모의 초상을 치를 때에 설포는 예법보다 더 많이 슬퍼하였다.
        얼마 뒤 아우의 아들이 재산을 나누어 따로 살기를 요구하니, 설포는 만류할 수가 없어서 이에 그 재산을 반으로 나누었는데, 노비에 대해서는, 늙은이를 이끌어들이면서 말하기를, "나와 일을 함께한 지가 오래이므로 네가 부릴 수 없을 것이다." 하였고, 논밭과 농막에 대해서는, 황폐하고 기울어진 것을 가지면서 말하기를, "내가 젊을 때에 농사도 짓고 기거도 하였으므로 정이 들었다." 하였고, 그릇과 물건들에 대해서는, 낡고 깨진 것을 가지면서 말하기를, "내가 평소에 쓰던 것이고 먹던 것이라 이것들이 몸에 편하고 입에 편하다." 하였다. 아우의 아들이 자주 재산을 탕진하니, 매번 다시 보살펴 재산을 지급하였다.

011 王祥性孝. 蚤喪親, 繼母朱氏不慈, 數譖之. 由是失愛於父, 每使掃除牛下, 祥愈恭謹, 父母有疾, 衣不解帶, 湯藥必親嘗, 母嘗欲生魚. 時天寒冰凍, 祥解衣, 將剖冰求之. 冰忽自解, 雙鯉躍出, 持之而歸. 母又思黃雀炙. 復有雀數十, 飛入其幕, 復以供母. 鄕里警嘆, 以爲孝感所致. 有丹柰結實, 母命守之, 每風雨祥輒抱樹而泣, 其篤孝純至如此.

012 王裒字偉元. 父儀爲魏安東將軍司馬昭司馬. 東關之敗, 昭問於衆曰, 近日之事誰任其咎. 儀對曰, 責任元帥. 昭怒曰, 司馬欲委罪於孤耶. 遂引出斬之. 裒痛父非命, 於是隱居敎授, 三徵七辟, 皆不就, 廬于墓側, 旦夕, 常至墓所, 拜跪, 攀栢悲號, 涕淚著樹. 樹爲之枯. 讀詩, 至哀哀父母, 生我劬勞, 未嘗不三復流涕. 門人受業者, 並廢蓼莪之篇. 家貧躬耕, 計口而田, 度身而蠶. 或有密助之者, 裒皆不聽. 及司馬氏簒魏, 裒終身未嘗西向而坐, 以示不臣于晉.

013 晉西河人王延事親色養. 夏則扇枕席, 冬則以身溫被, 隆冬盛寒, 體常無全衣, 而親極滋味.
       진나라 서하 사람 왕연은 어버이 섬기기를 기쁜 얼굴빛으로 하였다. 여름에는 베개와 자리를 부채로 부쳤고 겨울에는 몸으로 이불을 따뜻하게 해드렸다. 한겨울 큰 추위에 자신의 몸에는 늘 온전한 옷이 없었는데 어버이는 온갖 맛있는 음식을 모두 드셨다.

014 柳玭曰, 崔山南昆弟子孫之盛, 鄕族罕比. 山南曾祖王母長孫夫人, 年高無齒, 祖母唐夫人, 事姑孝, 每旦櫛縰笄, 拜於階下, 卽升堂, 乳其姑. 長孫夫人, 不粒食數年而康寧. 一日疾病, 長幼咸萃. 宣言無以報新婦恩. 願新婦有子有孫, 皆得如新婦, 孝敬, 則崔之門, 安得不昌大乎.

015 南齊庾黔婁爲孱陵令, 到縣未旬父易在家遘疾. 黔婁忽心驚, 擧身流汗, 卽日棄官歸家. 家人悉驚其忽至. 時易疾始二日. 醫云, 欲知差劇, 但嘗糞甛苦. 易泄利, 黔婁輒取嘗之. 味轉甛滑, 心愈憂苦, 至夕每稽顙北辰, 求以身代.

016 海虞令何子平, 母喪去官, 哀毁踰禮, 每哭踊頓絶方蘇. 屬大明末東土饑荒, 繼以師旅. 八年下得營葬, 晝夜號哭, 常如袒括之日, 冬不衣絮, 夏不就凊凉, 一日以米數合, 爲粥, 不進鹽菜. 所居屋敗, 不蔽風日, 兄子伯興欲爲葺理, 子平不肯曰, 我情事未申. 天地一罪人耳. 屋何宜覆. 蔡興宗爲會稽太守, 甚加矜賞, 爲營塚壙.

017 朱壽昌生七歲, 父守雍. 出其母劉氏, 嫁民間. 母子不相知者, 五十年. 壽昌行四方, 求之不已, 飮食罕御酒肉, 與人言輒流涕.
    熙寧初棄官入奏, 與家人訣, 誓不見母, 不得還. 行次同州, 得焉. 劉氏時年七十餘矣. 雍守錢明逸以事聞, 詔壽昌還就官. 繇是天下皆知其孝.
    壽昌再爲郡守. 至是, 以母故通判河中府, 迎其同母弟妹以歸. 居數歲母卒, 涕泣幾喪明. 拊其弟妹益篤, 爲買田宅居之, 其於宗族, 尤盡恩意, 嫁兄弟之孤女二人, 葬其不能葬者十餘喪. 盖其天性如此.
        주수창이 일곱 살 때에 아버지가 옹주(雍州) 수령으로 있으면서 그의 어머니 유씨를 내쫓아 민간에 시집가게 하여, 어머니와 아들이 모르고 지낸 지가 50년이 되었다. 주수창은 사방을 다니며 찾기를 그치지 않았다. 음식은 술과 고기를 먹는 일이 드물었고 남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엔 눈물을 흘리곤 하였다.
        희녕 초에 주수창은 관직을 버리고 진주(秦州)로 들어갔는데 집안 사람들과 헤어질 때 “맹세코 어머니를 만나지 않으면 다시 돌아오지 않겠다.” 하였다. 가는 길에 동주에 머물다가 유씨를 만났다. 유씨는 이때 나이가 70여 세였다. 옹주 수령 전명일이 이 일을 조정에 아뢰니, 주수창에게 조서를 내려 다시 관직에 나아가게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천하가 모두 그 효성을 알았다.
       
주수창이 두 번 군수를 지내고, 이 때에 이르러 어머니를 모시기 위해 하중부의 통판이 되어, 동모(어머니가 재가한 이후에 낳은) 아우와 누이를 데리고 돌아왔다. 함께 몇 년을 산 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많이 울어 거의 실명할 지경에 이르렀으며, 그 아우와 누이를 보살피기를 더욱 돈독히 하여, 그들을 위해 밭과 집을 사서 살게 하였다. 종족들에 대해서도 은혜를 더욱 극진히 하여, 아버지를 잃은 조카 둘을 시집보내주었고 장례를 치르지 못한 10여인을 (비용을 대주어서) 장례를 치르게 해주었다. 대개 그의 천성이 이러하였다.

018 伊川先生家, 治喪. 不用浮屠. 在洛亦有一二人家化之.

019 霍光出入禁闥二十餘年, 小心謹愼, 未嘗有過. 爲人沈靜祥審, 每出入下殿門, 進止有常處. 郎僕射竊識視之. 不失尺寸.

020 汲黯景帝時, 爲太子洗馬, 以嚴見憚. 武帝卽位, 召爲主爵都尉. 以數直諫, 不得久居位. 是時太后弟武安侯田蚡爲丞相. 中二千石拜謁, 蚡弗爲禮. 黯見蚡未嘗拜, 揖之.
    上方招文學儒者. 上曰, 吾欲云云. 黯對曰, 陛下內多欲而外施仁義. 奈何欲效唐虞之治乎. 上怒變色而罷朝. 公卿皆爲黯懼. 上退謂人曰, 甚矣. 汲黯之戇也.
    群臣或數黯, 黯曰, 天子置公卿輔弼之臣, 寧令從諛承意, 陷主於不義乎. 且已在其位. 縱愛身, 奈辱朝廷何.
    黯多病, 病且滿三月, 上常賜告者, 數, 終不癒. 最後嚴助爲請告. 上曰, 汲黯何如人也. 曰, 使黯任職居官, 亡以癒人, 然至其輔少主守成, 雖自謂賁育, 弗能奪也. 上曰, 然. 古有社稷之臣. 至如汲黯, 近之矣.
    大將軍靑侍中上踞厠視之, 丞相弘宴見, 上或時不冠, 至如見黯, 不冠而見也. 上嘗坐武帳. 黯前奏事. 上不冠, 望見黯避帷中, 使人可其奏. 其見敬禮如此.
        급암은 경제 때에 태자세마가 되어, 엄격함으로 해서 경제로부터 어려워하는 대상이 되었다.(or 꺼림을 당하였다. 너무 엄격하여 경제가 싫어하였다. 그래서 벼슬에서 물러났다.) 무제가 즉위하여, 불러서 주작도위를 삼았는데, 곧은 간언을 자주 하였으므로 자리에 오래 있을 수가 없었다. 당시에 태후의 아우인 무안후 전분이 승상이 되어, 2천석 녹봉을 받는 벼슬아치가 절을 하고 알현을 해도 전분은 예를 갖추지 않았다. 급암은 전분을 만나면 한번도 절하는 예를 차리지 아니하고 읍만 하였다.
        상이 바야흐로 글 잘하는 선비들을 불러들이고 있었는데, 상이 이르기를, "내가 이리저리.. 하고자 한다." 하니, 급암이 대답하기를, "폐하께서는 마음에 욕심을 많이 품고 겉으로만 인의를 베풀면서, 어찌 요순 시대의 정치를 본받고자 하십니까?" 하였다. 상이 화가 나서 안색이 변하고 조회를 파하였다. 공경들이 모두 급암을 걱정하였다. 상이 물러나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심하도다. 급암의 우직함이여." 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더러는 급암을 나무라니, 급암이 대답하기를, "천자께서 공경대신과 보필하는 신하를 둔 것이 어찌 따라 아첨하며 뜻을 받들어서 임금을 불의에 빠지게 하려 한 것이겠습니까. 또 이미 그 자리에 있으니, (곧은 말을 하지 않으면) 비록 몸은 아낀다 할지라도, 조정을 욕되게 함은 어찌한단 말입니까." 하였다.
        급암은 병이 많았다. 병든 지 석달이 다 차 가는데, 상이 항상 휴가를 주어 그것이 여러 차례였는데도 끝내 병이 낫지 않았다. 마지막에 엄조가 급암을 위하여 휴가를 청하였다. 상이 묻기를, "급암은 어떤 사람인가?" 하니, 답하기를, "급암에게 직무를 맡겨 벼슬살이를 시킨다면 남보다 더 나을 것이 별로 없습니다만, 그러나 나이어린 임금을 보필하고 이루어놓은 왕업을 지켜나가는 일이라면, 비록 맹분이나 하육을 자처하는 사람일지라도 그 기개를 빼앗을 수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 옛날에 목숨을 걸고 나라를 지킨 신하가 있었는데, 급암 같은 사람이라면 그에 가깝다." 하였다.
        대장군 위청이 궁중에서 상을 모실 때에는 상이 평상에 걸터앉아서 그를 만났고, 승상 공손홍이 공무가 아닌 일로 만날 때에는 상이 때로는 관을 쓰지 않고 만났으나, 급암을 만날 때에는 관을 쓰지 않고는 만나지 않았다. 상이 일찍이 군막에 앉아 있을 때에 급암이 나아와 일을 아뢰었는데, 상이 관을 쓰지 않고 있다가 급암이 오는 것을 멀리서 보고는 장막 속으로 피하고 사람을 대신 시켜서 그 아뢰는 일을 결재하게 하였으니, 그 공경과 예우를 받는 것이 이와 같았다.

021 初魏遼東公翟黑子, 有寵於太武. 奉使幷州, 受布千疋. 事覺, 黑子謀於著作郎高允曰, 主上問我, 當以實告. 爲當諱之. 允曰, 公帷幄寵臣. 有罪首實, 庶或見原, 不可重爲欺罔也. 中書侍郞崔鑑公孫質曰, 若首實, 罪不可測. 不如姑諱之. 黑子怨允曰, 君奈何誘人就死地. 入見帝, 不以實對, 帝怒, 殺之.
    帝使允授太子經. 及崔浩以史事被收, 太子謂允曰, 入見至尊, 吾自導卿. 脫已尊有問, 但依吾語.
    太子見帝言, 高允小心愼密, 且徵賤. 制由崔浩. 請赦其死. 帝召允問曰, 國書皆浩所爲乎. 對曰, 臣與浩共爲之. 然浩所領事多. 總裁而已, 至於著述, 臣多於浩. 帝怒曰, 允罪甚於浩. 何以得生. 太子懼曰, 天威嚴重. 允小臣. 迷亂失次耳. 臣曏問. 皆云, 浩所爲. 帝問允, 信如東宮所言乎. 對曰, 臣罪當滅族. 不敢虛妄. 殿下以臣侍講日久. 哀臣, 欲丐其生耳, 實不問臣, 臣亦無此言. 不敢迷亂.
    帝顧謂太子曰, 直哉. 此人情所難, 而允能爲之. 臨事不易辭信也. 爲臣不欺君貞也. 宜特除其罪, 以旌之. 遂赦之.
    他日太子讓允曰, 吾欲爲卿脫死, 而卿不從何也. 允曰, 臣與崔浩實同史事. 死生榮辱, 義無獨殊. 誠荷殿下再造之慈, 違心苟免, 非臣所願也. 太子動容稱嘆. 允退謂人曰, 我不奉東宮指導者, 恐負翟黑子故也.
       전에 위나라 요동공 적흑자는 태무제에게 총애를 받았는데, 명을 받들어 병주에 사신을 가서 베 천 필을 뇌물로 받았다. 일이 발각되자 적흑자는 저작랑 고윤에게 의논하기를, "주상께서 나에게 물으시면 사실대로 고하는 것이 마땅하겠는가, 숨기는 것이 마땅하겠는가?" 하였다. 고윤이 답하였다. "공은 유악의 총애받는 신하이니, 죄가 있음에 사실을 고하면 행여 용서받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거듭 속이는 짓을 해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중서시랑 최감과 공손질은 말하기를, "만일 사실을 고하면 예측할 수 없는 큰 벌을 받을 것이니, 우선 숨기는 것이 낫겠습니다." 하였다. 적흑자는 고윤을 원망하며 말하기를 "그대는 어찌하여 사람을 유인하여 죽을 곳으로 나아가게 하는가." 하고, 들어가 태무제를 뵙고 사실대로 대답하지 않았다. 이에 태무제는 격노하여 그를 죽였다.
       태무제가 고윤으로 하여금 태자에게 경서를 가르치게 하였다. 최호가 역사편찬의 일로 죽음을 당하자, 태자가 고윤에게 말하기를, "들어가 임금을 뵈오면 내가 경을 인도해 죽음을 면하게 할 것이니, 임금께서 물으시면 내 말만 따르십시오." 하였다.
       태자가 태무제를 뵙고 말씀드리기를, "고윤은 소심하고 신중하고 치밀하며, 또한 직책이 미천합니다. 저술은 최호가 한 것입니다. 고윤의 죽음을 면하게 해 주소서." 하였다. 태무제가 고윤을 불러 물었다. "국서(國書)를 모두 최호가 지었는가?" 고윤이 답하였다. "신과 최호가 함께 지었습니다. 그러나 최호는 맡은 일이 많은지라 일을 총괄했을 따름이고, 저술은 제가 최호보다 많이 하였습니다." 태무제가 노하여 말하기를, "고윤의 죄가 최호보다 심하니, 어찌 살 수가 있겠는가." 하였다. 태자가 두려워하여 말하기를, "지존의 위엄이 엄중하시니, 고윤이 낮은 신하인지라 정신이 혼미하여 말을 실수하였습니다. 제가 저번에 물어보니, 모두 최호가 한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태무제가 고윤에게 묻기를, " 정말 태자의 말과 같은가?" 하니, 고윤이 답하기를, "신의 죄는 멸족을 당해야 마땅합니다. 감히 허망한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태자께서는, 신이 시강한 날이 오래되었으므로, 신을 불쌍하게 여기시어 신의 목숨을 살려달라고 부탁드린 것입니다. 실제는 신에게 묻지 않았으며 신도 그러한 말씀을 드린 적이 없습니다. 어찌 감히 혼미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태무제가 태자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곧도다! 이는 사람이 하기 어려운 일인데 고윤이 이렇게 하였구나. 죽음 앞에서 말을 바꾸지 않음은 신의요 신하로서 임금을 속이지 않음은 곧음이다. 마땅히 그의 죄를 특별사면하여 정표하여야 하겠다." 하고, 드디어 그를 사면하였다.
       뒤에 태자가 고윤을 꾸짖기를, "내가 경을 위하여 죽음을 벗어나게 해 주고자 하였는데, 경이 따르지 않음은 어찌해서인가?" 하니, 고윤이 답하기를, "신은 최호와 더불어 실로 역사편찬의 일을 함께 하였으니, 죽거나 살거나 영화롭거나 욕됨에 의리상 저만 홀로 달라야 할 이치가 없습니다. 진실로 목숨을 구해주신 전하의 은혜를 입었으나, 마음을 어기고 구차히 면함은 신이 원하는 바가 아닙니다." 하였다. 태자는 용모를 가다듬고 칭찬하고 감탄하였다. 고윤이 물러나와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동궁의 지도를 받들지 않은 것은 적흑자를 저버릴까 두렵기 때문이다." 하였다.

022 李君行先生名潛. 虔州人. 入京師. 至泗州, 留止. 其子弟請先往, 君行問其故. 曰, 科場近. 欲先至京師, 貫開封戶籍, 取應. 君行不許曰, 汝虔州人, 而貫開封戶籍, 欲求事君, 而先欺君, 可乎. 寧遲緩數年, 不可行也.

023 崔玄暐母盧氏嘗誡玄暐曰, 吾見姨兄屯田郞中幸玄馭. 曰, 兒子從宦者, 有人來云, 貧乏不能存. 此是好消息, 若聞貲貨充足, 衣馬輕肥. 此惡消息. 吾嘗以爲確論.
    比見親表中仕宦者, 將錢物, 上其父母父母但知喜悅, 竟不問此物, 從可而來. 必是祿俸餘資, 誠亦善事, 如其非理所得, 此如盜賊何別. 縱無大咎, 獨不內愧於心. 玄暐遵奉敎誡, 以淸謹見稱.
       최현위의 어머니 노씨가 일찍이 현위를 훈계하기를, "내가 이종 사촌 오빠인 둔전낭중 신현어를 만났더니 말하기를, '벼슬살이를 하고 있는 아들에 대해서, 사람이 와서, 가난하여 살아갈 수 없을 지경이더라고 하면, 이는 좋은 소식이지만, 만약 재화가 풍족하여 옷과 말이 가볍고 살쪘더라는 말이 들리면, 이는 나쁜 소식이다.' 라고 하였는데, 나는 일찍이 그 말을 바꿀수 없는 명확한 의논이라고 여겼다.
       근래에 보건대, 친족과 외족 가운데 벼슬살이를 하는 자가 돈과 선물을 갖다가 그 부모에게 올리면, 부모는 기뻐할 줄만 알고, 이 물건이 어디서 왔는지는 끝내 묻지 않는다. 반드시 녹봉에서 남은 재물이라면 참으로 또한 좋은 일이지만, 만약 비리로 얻은 것이라면 이는 도적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큰 허물은 없더라도 어찌 안으로 마음에 수치스럽지 않겠는가." 하니, 현위가 가르침을 따라 받들어, 청렴과 근신으로 칭찬을 받았다.

024 劉器之待制初登科, 與二同年, 謁張觀參政. 三人同起身, 請敎, 張曰, 某自守官以來常持四字. 勤謹和緩. 中間一後生應聲曰, 勤謹和旣聞命矣. 緩之一字某所未聞. 張正色作氣曰, 何嘗敎賢緩不及事. 且道世間甚事不因忙後錯了.
        대제 유기지가 처음 과거에 올랐을 때에 동년(같은 과거에 오른 자) 두 사람과 함께 참정 장관을 알현하였다. 세 사람이 함께 몸을 일으켜 가르침을 청하니, 장관이 말하기를, "나는 관직을 맡고부터 항상 네 글자를 마음에 지니고 (지켜나가고) 있으니, 부지런함[勤], 신중함[謹], 온화함[和], 느긋함[緩]이다." 하였는데, 말하는 중간에 (말씀이 끝나기도 전에) 한 후생이 맞받아 말하기를, "부지런함, 신중함, 온화함에 대해서는 말씀을 잘 알겠습니다만, 느긋함에 대해서는 제가 아직 잘 알아듣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장관이 안색을 바루고 목소리를 가다듬어 말하기를, "어찌 자네들로 하여금 느슨하게 해서 일을 제때 제대로 안 하도록 하려 한 것이겠는가. 세상 일이란 게 무슨 일이든 (그릇되게 되는 경우는) 황망하게 처리하다가 그릇되게 됨을 말하고자 한 것이다." 하였다.

025 伊川先生曰, 安定之門人, 往往知稽古愛民矣. 則於爲政也何有.

026 呂滎公自少官守處, 未嘗干人擧薦. 其子舜從守官會稽, 人或譏其不求知者, 舜從對曰, 勤於職事, 其他不敢不愼. 乃所以求知也.

027 漢陳孝婦年十六而嫁, 未有子. 其夫當行戍, 且行時屬孝婦曰, 我生死未可知. 幸有老母. 無他兄弟備養. 吾不還, 汝肯養吾母乎. 婦應曰, 諾. 夫果死不還, 婦養姑不衰, 慈愛愈固, 紡績織紝, 以爲家業, 終無嫁意. 居喪三年, 其父母哀其少無子, 而早寡也, 將取嫁之. 孝婦曰, 夫去時, 屬妾以供養老母, 妾旣許諾之. 夫養人老母, 而不能卒, 許人以諾, 而不能信, 將何以立於世. 欲自殺, 其父母懼, 而不敢嫁也, 遂使養其姑. 二十八年姑八十餘. 以天年終, 盡賣其田宅財物, 以葬之, 終奉祭祀. 淮陽太守以聞, 聞使使者, 賜黃金四十斤, 復之, 終身無所與. 號曰, 孝婦.

028 漢鮑宣妻桓氏, 字少君. 宣嘗就少君父學. 父奇其淸苦, 故以女妻之. 將送資賄甚盛, 宣不悅, 謂妻曰, 少君生富驕, 習美飾. 而吾實貧賤. 不敢當禮. 妻曰, 大人以先生修德守約, 故使賤妾侍執巾櫛. 旣奉承君子, 惟命是從. 宣笑曰, 能如是, 是吾志也. 妻乃悉歸侍御服飾, 更著短布裳. 與宣共挽鹿車. 歸鄕里, 拜姑禮畢, 提甕出汲, 修行婦道. 鄕邦稱之.
        한나라 포선의 아내 환씨는 자가 소군이었다. 포선은 일찍이 소군의 아버지에게 나아가 배웠는데, 소군의 아버지는 포선의 청고함을 기특하게 여겨, 딸을 그에게 시집보냈다. 치장하여 보내는 재물이 아주 성대하자, 포선이 기뻐하지 않으며 아내에게 말하기를 "소군은 부유하고 교만한 집안에서 자라 아름답게 꾸미는 일에 익숙하겠지만 나는 실로 가난하고 천하여 예(禮)를 감당할 수 없습니다." 하니, 아내가 말하기를 "아버지께서는 선생이 덕을 닦고 검약을 지키기 때문에 저로 하여금 선생을 모시게 하셨습니다. 이미 군자(남편)를 받들었으니 오직 명령을 따를 뿐입니다." 라고 하였다. 포선이 웃으며 말하기를 "그렇게 할 수 있다면, 그게 바로 내 뜻입니다." 하였다. 아내는 이에 하인들과 복식을 모두 돌려보내고 짧은 삼베치마로 바꾸어 입고, 포선과 함께 작은 수레 하나만을 끌고 포선의 마을로 돌아왔다. 시어머니께 절하는 예를 마치고, 물동이를 들고 손수 물을 길으러 나갔으며, 부인의 도리를 닦아 행하였다. 고을 사람들이 그를 칭찬하였다.

029 曹爽從弟文叔妻, 譙郡夏侯文寧之女. 名令女. 文叔蚤死, 服闋, 自以年少無子. 恐家必嫁己, 乃斷髮爲信. 其後家果欲嫁之, 令女聞, 卽復以刀截兩耳, 居止常依爽. 及爽被誅, 曹氏盡死, 令女叔父上書, 與曹氏絶婚, 彊迎令女歸. 時文寧爲梁相一作州. 憐其少執義, 又曹氏無遺類. 冀其意阻, 乃徵使人-風之, 令女嘆且泣曰, 吾亦惟之. 許之是也. 家以爲信, 防之少懈, 令女於是竊入寢室, 以刀斷鼻, 蒙席而臥, 其母呼與語, 不應, 發被視之. 血流滿床席, 擧家驚惶, 往視之, 莫不酸鼻. 或謂之曰, 人生世間, 如輕塵棲弱草耳. 何辛苦乃爾. 且夫家夷滅已盡. 守此欲誰爲哉. 令女曰, 聞仁者, 不以盛衰改節, 義者, 不以存亡易心. 曹氏全盛之時, 尙欲保終, 况今衰亡. 何忍棄之. 禽獸之行, 吾豈爲乎.

030 唐鄭義宗妻, 盧氏略涉書史, 事舅姑, 甚得婦道. 嘗夜有强盜數十, 持杖鼓噪, 踰垣而入. 家人悉奔㰜…, 唯有姑自在室, ,盧冒白刃, 往至姑側, 爲賊捶擊, 幾死. 賊去後家人問, 何獨不懼. 盧氏曰, 人所以異於禽獸者, 以其有仁義也. 隣里有急, 尙相赴救, 况在於姑, 而可委棄乎. 若萬一危禍, 豈宜獨生.

031 唐奉天竇氏二女, 生長草野, 幼有志操. 永泰中群盜數千人, 剽掠其村落, 二女皆有容色, 長者年十九. 幼者年十六. 匿巖穴間, 曳出之, 驅迫以前. 臨壑谷深數百尺, 其姊先曰, 吾寧就死, 義不受辱. 卽投崖下而死, 盜方驚駭. 其妹繼之自投, 折足破面流血, 群盜乃捨之而去. 京兆尹第五琦, 嘉其貞烈, 奏之, 詔旌表其門閭, 永蠲其家丁役.

032 穆肜少孤, 兄弟四人, 皆同財業. 及各取妻, 諸婦遂求分異, 又數有鬪爭之言, 肜深懷忿嘆, 乃掩戶自撾曰, 穆肜汝修身謹行, 學聖人之法, 將以齊整風俗. 奈何不能正其家乎. 弟及諸婦聞之, 悉叩頭謝罪, 遂更爲敦睦之行.

033 蘇瓊除南淸河太守. 有百姓乙普明兄弟爭田, 積年不斷, 各相援據. 乃至百人. 瓊召普明兄弟, 諭之曰, 天下難得者兄弟. 易求者田地. 假令得田地, 失兄弟心, 如何. 因而下淚, 諸證人莫不灑泣. 普明兄弟叩頭, 乞外更思, 分異十年, 遂還同住.

034 王祥弟覽母朱氏, 遇祥無道. 覽年數歲, 見祥被楚撻, 輒涕泣抱持, 至于成童, 每諫其母. 其母少止凶虐. 朱屢以非理使祥, 覽與祥俱, 又虐使祥妻, 覽妻亦趨而共之. 朱患之, 乃止.

035 晉右僕射鄧攸永嘉末沒于石勒, 過泗水. 攸以牛馬負妻子而逃, 又遇賊, 掠其牛馬, 步走, 擔其兒及其弟子綏. 度不能全, 乃謂其妻曰, 吾弟早亡, 唯有一息. 理不可絶. 止應自棄我兒耳. 幸而得存, 我後當有子. 妻泣而從之, 乃棄其子而去之. 卒以無嗣. 時人義而哀之, 爲之語曰, 天道無知, 使鄧伯道無兒. 弟子綏服攸喪三年.

036 晉咸寧中大疫. 庾袞二兄俱亡, 次兄毗復危殆, 癘氣方熾, 父母諸弟皆出次于外, 袞獨留不去, 諸父兄强之, 乃曰, 袞性不畏病. 遂親自扶持, 晝夜不眠, 其間復無柩, 哀臨不輟. 如此十有餘旬, 疫勢旣歇, 家人乃反. 毗病得差, 袞亦無恙. 父老咸曰, 異哉. 此子. 守人所不能守, 行人所不能行, 歲寒, 然後知松柏之後凋. 始知疫癘之不能相染也.

037 楊播家世純厚, 並敦義讓, 昆季相事, 有如父子. 椿津恭謙, 兄弟旦則聚於廳堂, 終日相對, 未嘗入內, 有一美味, 不集不食. 廳堂間往往幃幔隔障, 爲寢息之所, 時就休偃, 還共談笑. 椿年老, 曾他處醉歸, 津扶持還室, 假寢閤前, 承候安否. 椿津年過六十, 並登台鼎, 而津常旦莫參問, 子姪羅列階下. 椿不命坐, 津不敢坐. 椿每近出, 或日斜不至, 津不先飯, 椿還然後共食. 食則津親授匙箸, 味皆先嘗, 椿命食然後食. 津爲肆州椿在京宅. 每有四時嘉味, 輒因使次, 附之, 若或未寄, 不先入口. 一家之內男女百口. 緦服同爨, 庭無間言.

038 隋吏部尙書牛弘弟弼, 好酒而酗. 嘗醉. 射殺弘駕車牛, 弘還宅, 其妻迎謂弘曰, 叔射殺牛. 弘聞, 無所怪問. 直答曰, 作脯. 坐定, 其妻又曰, 叔射殺牛. 大是異事. 弘曰, 已知. 顔色自若, 讀書不輟.
        수나라 이부상서 우홍의 아우 우필은 술을 좋아하여 술주정뱅이었다. 한번은 술에 취하여, 우홍의 수레모는 소를 활로 쏘아 죽였다. 우홍이 집에 돌아오자 그의 아내가 맞이하며 우홍에게 말하기를, "시숙께서 소를 쏘아죽였습니다."하니, 우홍이 듣고는 달리 묻는 말 없이 답하기를, "포를 만드시오." 하였다. 우홍이 자리에 앉자 그 아내가 또 말하기를, "시숙께서 소를 쏘아죽였다니까요. 아주 중대한 일입니다." 하니, 우홍이 답하기를, "이미 알고 있소." 하고, 안색이 태연하고 글읽기를 그치지 않았다.

039 唐英公李勣, 貴爲僕射, 其姊病, 必親爲然火煮粥. 火焚其鬚, 姊曰, 僕妾多矣. 何爲自若如此. 勣曰, 豈爲無人耶. 顧今姊年老, 勣亦老. 雖欲數爲姊煮粥, 復可得乎.
        당나라 영공 이적은 신분이 복야가 되었는데도 그 누님이 병환이 있으면 반드시 몸소 누님을 위해 불을 때서 죽을 끓였다. 불이 그의 수염을 그스르자 누님이 말하기를, "종과 첩이 많은데 어찌 이런 고생을 하느냐?" 하니, 이적이 답하기를, "어찌 사람이 없어서이겠습니까? 다만, 지금 누님은 나이가 많으시고 저도 또한 늙었으니, 비록 누님을 위해 자주 죽을 끓이고 싶더라도 다시 그럴 기회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040 司馬溫公與其兄伯康, 友愛尤篤. 伯康年將八十. 公奉之如嚴父, 保之如嬰兒, 每食少頃則問曰, 得無饑乎. 天少冷則拊其背曰, 衣得無薄乎.

041 近世故家惟晁氏, 因以道申戒子弟, 皆有法度. 群居相呼, 外姓尊長, 必曰, 某姓第幾叔若兄. 諸姑尊姑之夫, 必曰, 某姓姑夫某姓尊姑夫. 未嘗敢呼字也, 其言父黨交游必曰, 某姓幾丈. 亦未嘗敢呼字也. 當時故家舊族, 皆不能若是.

042 包孝肅公尹京時, 民有自言, 以白金百兩, 寄我者死矣, 予其子. 不肯受. 願召其子, 予之. 尹召其子, 辭曰, 亡父未嘗以白金委人也. 兩人相讓久之.
    呂滎公聞之曰, 世人喜言無好人三字者, 可謂自賊者矣. 古人言, 人皆可以爲堯舜. 蓋觀於此而知之.
        포효숙공이 서울의 영윤으로 있을 때에 어떤 백성이 와서 말하기를, "백금 백냥을 저에게 맡겼던 자가 죽었습니다. 그 아들에게 주었더니 받으려고 하지를 않습니다. 그 아들을 불러다 그에게 백금을 주소서." 하였다. 영윤이 그 아들을 불러 (백금을 돌려주려 하니) 아들이 사양하기를, "선친께서는 백금을 남에게 맡긴 적이 없습니다." 하였다. 두 사람이 서로 사양하기를 오래도록 하였다.
       여형공이 이 소문을 듣고 말하기를, "세상 사람들 중에 '좋은 사람이 없다.'는 말을 말하기 좋아하는 자는 자신을 해치는 자라고 할 수 있다. 옛사람의 말에, '사람은 모두가 요순이 될 수가 있다.' 하였으니, 이 일을 보면 그말이 사실임을 알 수 있다." 하였다.

043 萬石君石奮歸老于家. 過宮門關, 必下車趨, 見路馬, 必軾焉. 子孫爲小吏來歸謁, 萬石君必朝服見之, 不名. 子孫有過失, 不誚讓, 爲便坐, 對案不食, 然後諸子相責, 因長老, 肉袒, 固謝罪改之, 乃許. 子孫勝冠者在側, 雖燕必冠, 申申如也, 僮僕訢訢如也, 唯謹. 上時賜食於家, 必稽首俯伏而食, 如在上前, 其執喪哀戚甚. 子孫遵敎, 亦如之. 萬石君家以孝謹, 聞乎郡國. 雖齊魯諸儒, 質行皆自以爲不及也. 長子建爲郞中令, 少子慶爲內史. 建老白首, 萬石君尙無恙. 每五日洗沐歸謁, 親入子舍, 竊問侍者, 取親中裙厠牏, 身自浣滌, 每與侍者言, 不敢令萬石君知之以爲常. 內史慶醉歸, 入外門, 不下車, 萬石君聞之, 不食, 慶恐, 肉袒謝罪, 不許, 擧宗及兄建肉袒, 萬石君讓曰, 內史貴人. 入閭里. 里中長老皆走匿, 而內史坐車中自如. 固當. 乃謝罷慶, 慶及諸子入里門, 趨至家.

044 疏廣爲太子太傳. 上疏乞骸骨, 加賜黃金二十斤, 太子贈五十斤, 歸鄕里, 日令家供具設酒食, 請族人故舊賓客, 相與娛樂, 數問其家, 金餘尙有幾斤. 趣賣以供具.
    居歲餘廣子孫竊謂其昆弟老人廣所信愛者, 曰, 子孫冀及君時, 頗立産業基址. 今日飮食費且盡. 宜從丈人所, 勸說君, 置田宅. 老人卽以閒暇時爲廣言此計,
    廣曰, 吾豈老悖, 不念子孫哉. 顧自有舊田廬. 令子孫勤力其中, 足以共衣食, 與凡人齊. 今復增益之, 以爲嬴餘, 但敎子孫怠惰耳. 賢而多財, 則損其志, 愚而多財, 則益其過. 且夫富者, 衆之怨也. 吾旣無以敎化子孫. 不欲益其過而生怨. 又此金者, 聖主所以惠養老臣也. 故樂與鄕黨宗族, 共享其賜, 以盡吾餘日. 不亦可乎.
        소광이 태자태부로 있을 때에, 상소하여 물러나기를 청하자 (상이 그 요청을 허락하고) 황금 20근을 하사하였고, 태자가 50근을 주었다. 소광은 (그 황금을 가지고) 고향으로 돌아와 날마다 집안 사람들로 하여금 음식을 장만하여 술상 밥상을 차리게 하여, 친지들과 옛 벗들과 손님들을 초청하여 함께 즐겼다. 자주 집안 사람들에게, 남은 황금이 몇 근이나 되는지 물어, 팔아서 음식을 마련하라고 재촉하였다.
        그렇게 한 해 남짓 지난 뒤에, 소광의 자손들이, 소광의 형제 노인으로서 소광이 믿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말하기를, "저희들은 아버지께서 계실 때에 산업의 기반을 세웠으면 하고 기대하였는데, 지금 먹고 마시는 데에 다 쓰고 바닥이 나게 생겼습니다. 어르신의 말씀으로 우리 아버지를 설득하여 전택이라도 마련해 두게 해 주십시오." 하였다. 노인은 곧바로 한가한 때에, 소광에게 그렇게 하라고 말하였다.
       소광이 답하였다. "내가 어찌 늙고 사리분별을 못해서 자손들을 생각지 않겠는가. 다만 우리집에는 대대로 물려받은 전답이 있으니, 그곳에서 자손들이 열심히 노력하면 입을 것과 먹을 것은 충분히 마련하여 일반 사람들과 같게 살 수 있다. 지금 다시 덧붙여주어 남음이 생기게 하는 것은 단지 자손들로 하여금 나태하게 되도록 하는 것일 뿐이다. 어질면서 재산이 많으면 뜻을 손상시키고 어리석으면서 재산이 많으면 허물을 더하게 된다. 그리고 부유함은 사람들의 원망이 모이는 곳이다. 내가 자손들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했으니 그 허물을 더하게 해서 원망을 받게 하고 싶지가 않다. 또 이 황금은 임금께서 늙은 신하를 봉양하려고 내리신 것이다. 그러니 즐거이 마을사람들과 친지들을 불러 임금께서 내리신 은혜를 함께 누리며 나의 여생을 마치는 것이 또한 괜찮지 않겠는가."

045 龐公未嘗入城府, 夫妻相敬如賓. 劉表候之. 龐公釋耕於壟上, 而妻子耘於前, 表指而問曰, 先生若居畎畝而不肯官祿. 後世何以遺子孫乎. 龐公曰, 世人皆遺之以危, 今獨遺之以安. 雖所遺不同, 未爲無所遺也. 表嘆息而去.
        방공은 도성 안에 들어가지 않고 (성 밖에서 살면서) 부부가 서로를 손님 대하듯이 공경하며 살았다. 유표가 방문하니, 방공은 밭둔덕에서 밭갈기를 멈추었고 (유표를 맞이했고) 그 처자들은 그 앞에서 김을 매고 있었다. 유표가 처자들을 가리키며 묻기를, "선생께서 고생스럽게 농사를 짓고 살면서 벼슬을 하려 하지 않으시니 나중에 자손들에게 무엇을 남겨주려 하시오?" 하니, 방공이 대답하기를, "세상 사람들은 모두 위태함을 남겨주는데 나는 오직 자손들에게 안정됨을 남겨줍니다. 남겨주는 게 같지는 않지만, 남겨주는 게 없는 건 아닙니다." 하였다. 유표는 탄식하고 떠났다.

046 陶淵明爲彭澤令, 不以家累自隨. 送一力, 給其子, 書曰, 汝旦夕之費, 自給爲難, 今遺此力, 助汝薪水之勞. 此亦人子也. 可善遇之.

047 崔孝芬兄弟, 孝義慈厚. 弟孝暐等奉孝芬, 盡恭順之禮, 坐食進退, 孝芬不命則不敢也, 鷄鳴而起, 且溫顔色, 一錢尺帛, 不入私房, 吉凶有須, 聚對分給. 諸婦亦相親愛, 有無共之. 孝芬叔振旣亡後, 孝芬等承奉叔母李氏, 若事所生, 旦夕溫凊, 出入啓覲, 家事巨細一以咨決, 每兄弟出行, 有獲則尺寸以上皆入李之庫, 四時分賚李氏自裁之. 如此二十餘歲.

048 王凝常居慄如也. 子弟非公服, 不見, 閨門之內若朝廷焉. 御家以四敎. 勤儉恭恕. 正家以四禮. 冠婚喪祭. 聖人之書及公服禮器不假, 垣屋什物必堅朴, 曰, 無苟費也. 門巷果木必方列曰, 無苟亂也.

049 張公藝九世同居. 北齊隋唐, 皆旌表其門. 麟德中, 高宗封泰山, 幸其宅, 召見公藝, 問其所以能睦族之道, 公藝請紙筆以對, 乃書忍字百餘以進. 其意以爲宗族所以不協, 由尊長衣食, 或有不均, 卑幼禮節, 或有不備, 更相責望, 遂爲乖爭. 苟能相與忍之, 則家道雍睦矣.
        장공예는 9대가 함께 살았는데 북제, 수나라, 당나라 시대에 모두 그 집의 문에 정표를 하였다. 당나라 고종 때에 고종이 태산에 제사를 올린 뒤, 그의 집을 방문하여 장공예를 불러 만나서, 그렇게 종족을 화목하게 할 수 있었던 방법을 물었다. 장공예는 종이와 붓으로 대답하겠다고 하고 이에 '참을 인'자 백여 자를 써서 바쳤다. 그 뜻은, '종족이 화합하지 못하는 까닭은, 높은 어른이 옷과 음식을 나눠줄 때에 더러 고르지 못함이 있고 아랫사람들이 예절을 혹 제대로 갖추지 못함이 있어서 서로 책망을 하여 드디어 어긋나고 다투게 되기 때문이니, 참으로 서로 잘 참으면 집안이 화목해집니다.'라는 것이었다.

050 韓文公作董生行曰, 淮水出桐栢山, 東馳遙遙, 千里不能休, 淝水出其側, 不能千里, 百里入淮流. 壽州屬縣有安豊. 唐貞元年時, 縣人董生召南, 隱居行義於其中. 刺史不能薦. 天子不聞名聲. 爵祿不及門. 門外惟有吏, 日來徵租更索錢.
    嗟哉董生. 朝出耕, 夜歸讀古人書. 盡日不得息, 或山而樵, 或水而漁. 入廚具甘旨, 上堂問起居. 父母不慼慼, 妻子不咨咨.
    嗟哉董生. 孝且慈人不識, 唯有天翁知, 生祥下瑞無時期. 家有狗乳出求食, 雞來哺其兒, 啄啄庭中拾蟲蟻, 哺之不食鳴聲悲, 彷徨躑躅久不去, 以翼來覆待狗歸.
    嗟哉董生. 誰將與儔. 時之人夫妻相虐, 兄弟爲讎, 食君之祿, 而令父母愁. 亦獨何心. 嗟哉董生, 無與儔.
        한문공이 동생행을 지었으니, 그 내용은 이러하다.
 회수는 동백산에서 나와서 동쪽으로 아득히 내달려 천 리를 흘러 쉬지 못하는데, 비수는 그 옆에서 나와서 천 리를 가지 못하고 백 리를 가서는 회수로 들어간다. 수주의 속현에 안풍현이라고 있는데, 당나라 정원 년간에 그 현의 사람인 동소남이 그곳에 은거해 살면서 의로운 일을 행하였다. 자사는 천거하지 못하고, 천자는 그 명성을 듣지 못하니, 작록이 그의 문에 이르지 못하였다. 문밖에는 아전이 와서 날마다 세금을 독책하고 또 돈을 거두어 가는구나.
        아, 동생이여. 아침엔 나가 밭을 갈고 밤이면 돌아와 옛사람의 글을 읽는구나. 해가 저물도록 쉬지 못하고 산에 가서 나무하고 물에 가서 고기를 잡는구나. 부엌에 들어가 맛있는 음식을 갖추고 마루에 올라가 안부를 여쭈니, 부모님은 근심이 없고 처자들은 불평이 없구나.
        아, 동생이여. 그 효성과 자애로움을 사람들은 알지 못하는데, 오직 하늘만이 알아서, 상서를 내림이 시기가 없구나. 집에 새끼낳은 개가 먹이를 구하러 나가자 닭이 와서 그 새끼를 먹여주려 하였네. 뜰에서 벌레와 개미를 쪼아 물어다가 강아지에게 주었는데 강아지가 안 먹으니 닭은 슬프게 울었네. 방황하고 머뭇거리며 오래도록 떠나지를 못하고 날개로 강아지를 덮어주며 어미개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네.
       아, 동생이여. 누가 그와 짝하랴. 세상 사람들은 부부가 서로 학대하고 형제끼리도 원수가 되어, 임금이 주는 봉록을 받아먹으면서도 부모로 하여금 근심하게 하니, 또한 무슨 마음이란 말인가. 아, 동생이여. 짝할 이가 없구나.

051 唐河東節度使柳公綽在公卿間, 最名有家法. 中門東有小齋. 自非朝謁之日, 每平旦輒出至小齋, 諸子仲郢皆束帶, 晨省於中文之北. 公綽決私事, 接賓客, 與弟公權及群從弟再會食, 自朝至莫不離小齋, 燭至則命一人子弟, 執經史, 躬讀一過訖, 乃講議居官治家之法, 或論文, 或聽琴, 至人定鍾, 然後歸寢, 諸子復昏定於中門之北. 凡二十餘年, 未嘗一日變易. 其遇飢歲, 則諸子皆蔬食. 曰, 昔吾兄弟侍先君爲丹州刺史, 以學業未成不聽食肉. 吾不敢忘也. 姑姊妹姪有孤嫠者, 雖疎遠, 必爲擇壻嫁之, 皆用刻木粧奩, 纈文絹爲資裝. 常言, 必待資粧豐備, 何如嫁不失時. 及公綽卒, 仲郢一遵其法, 事公權如事公綽, 非甚病, 見公權未嘗不束帶. 爲京兆尹鹽鐵使, 出遇公權於通衢, 必下馬端笏立, 候公權過, 乃上馬, 公權莫歸, 必束帶迎候於馬首. 公權屢以爲言, 中郢終不以官達有小改. 公綽妻韓氏相國休之曾孫. 家法嚴肅儉約, 爲搢紳家楷範. 歸柳氏三年無少長未嘗見其啓齒, 常衣絹素, 不用綾羅錦繡, 每歸覲不乘金碧輿, 祗乘竹兜子, 二靑衣, 步屣以隨. 常命粉苦蔘黃連熊膽, 和爲丸, 賜諸子, 每永夜習學含之, 以資勤苦.

052 江州陳氏, 宗族七百口. 每食設廣席, 長幼以次坐, 而共食之. 有畜犬百餘, 共一牢食. 一犬不志, 諸犬爲之不食.
        강주의 진씨 집안은 종족이 700 식구였는데, 밥을 먹을 때마다 넓은 자리를 펴고 어른과 아이들이 차례로 앉아서 함께 밥을 먹었다. 기르는 개 100여 마리가 있었는데 함께 한 우리에서 밥을 먹었고, 한 마리가 오지 않으면 다른 개들은 오지 않은 그 개를 기다리며 밥을 먹지 않았다.

053 溫公曰, 國朝公卿能守先法, 久而不衰者, 唯故李相家. 子孫數世至二百餘口, 猶同居共爨, 田園邸舍所收及有官者俸祿, 皆聚之一庫, 計口日給餉, 婚姻喪葬所費, 皆有常數, 分命子弟, 掌其事. 其規模大抵出於翰林學士宗諤所制也. 右, 實明倫.

054 或問第五倫曰, 公有私乎.
    對曰, 昔人有與吾千里馬者, 吾雖不受, 每三公有所選擧, 必不能忘, 而亦終不用也, 吾兄子嘗病, 一夜十往, 退而安寢, 吾子有疾, 雖不省視, 而竟夕不眠. 若是者, 豈可謂無私乎.
        어떤 사람이 제오륜에게 물었다.
        "공도 사사로움이 있습니까?"
        제오륜이 대답하였다. "전에 나에게 천리마를 준 사람이 있었는데, 내가 비록 받지는 않았지만, 매양 삼공이 인재를 선발하는 일이 있으면 (삼공의 한 사람이었던 나는) 마음에 잊을 수가 없었고, 또한 끝내 등용하지도 않았습니다. 내 형의 아들이 병이 들었을 때에는 하룻밤에 열 번을 가서 문병하였으나 돌아와서는 편안히 잠이 들었는데, 내 아들이 병이 들었을 때에는 비록 문병을 가지는 못했지만 저녁 내내 잠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것을 어찌 사사로움이 없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055 劉寬雖居倉卒, 未嘗疾言遽色. 夫人欲試寬令恚, 伺當朝會, 裝嚴已訖, 使侍婢奉肉羹, 翻汚朝服, 婢遽收之. 寬神色不異, 乃徐言曰, 羹爛汝手乎. 其性度如此.
        유관은 비록 창졸간에 있더라도 일찍이 말을 빨리 하거나 안색을 갑자기 바꾸는 일이 없었다. 부인이 유관을 시험하여 한번 화를 나게 해 볼 요량으로, 조회에 나가는 날 의관을 다 갖춘 것을 엿보고는, 모시는 여종으로 하여금 고깃국을 받들고 가서 그릇을 엎어 조복을 더럽히게 하였다. 여종이 쏟은 국을 허둥지둥 쓸어담으니, 유관은 마음과 안색에 전혀 변화가 없이, 천천히 말하기를, "국이 네 손을 데었느냐?" 하였다. 그 성품과 도량이 이러하였다.

056 張湛矜嚴好禮, 動止有則, 居處幽室, 必自修整, 雖遇妻子, 若嚴君焉. 及在鄕黨, 祥言正色. 三輔以爲儀表. 建武初爲左馮翊. 告歸平陵, 望寺門而步, 主薄進曰, 明府位尊德重. 不宜自輕. 湛曰, 禮下公門, 軾路馬, 孔子於鄕黨恂恂如也. 父母之國, 所宜盡禮. 何爲輕哉.

057 楊震所擧荊州茂才王密爲昌邑令. 謁見, 懷金十斤, 以遺震, 震曰, 故人知君, 君不知故人何也. 密曰, 莫夜. 無知者. 震曰, 天知神知我知子知. 何謂無知. 密愧而去.
        양진이 천거해준 형주의 무재 왕밀이 창읍의 수령이 되어 양진을 알현할 적에 황금 10근을 품고 가서 양진에게 바쳤다.
양진이 말하였다.
        "나는 그대를 아는데 그대는 나를 모르니 어째서인가?"
        왕밀이 답하였다.
        "늦은 밤이어서 아무도 모릅니다."
        양진이 말하였다.
        "하늘이 알고 귀신이 알고 내가 알고 자네가 아는데, 어찌 아무도 모른다고 하는가?"
         왕밀은 부끄러워하며 (황금을 가지고) 물러나왔다.

058 茅容與等輩避雨樹下. 衆皆夷踞相對, 容獨危坐愈恭, 郭林宗行見之而奇其異, 遂與共言, 因請寓宿. 旦日容殺鷄爲饌, 林宗謂, 爲己設. 旣而以供其母, 自以草蔬與客同飯, 林宗起, 拜之曰, 卿賢乎哉. 因勸令學, 卒以成德.
        모용이 친구들과 함께 (or 모용과 친구들이) 나무 아래에서 비를 피하였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편안히 걸터앉아 서로 마주하고 있었는데 (앉아서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하고 있었는데) 모용은 홀로 (다른 사람들과 달리) 무릎을 꿇고 더욱 공손한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당대의 명사) 곽림종이 지나다가 이것을 보고 그 특이함을 기특하게 여겨 더불어 이야기를 나누고 인하여 모용의 집에서 묵었다. 다음날 아침, 모용이 닭을 잡아서 음식을 만드니 곽림종은 자기를 대접하기 위해서 마련하는 것이라고 여겼는데, 얼마뒤 모용은 (그 닭요리를) 어머니에게 올리고 자신은 채소 반찬으로 손님(곽림종)과 함께 밥을 먹었다. 곽림종이 일어나 절을 하고 말하기를, "그대는 참 훌륭한 사람이오." 하고, 권하여 학문을 하도록 해서, 마침내 덕을 이루었다.(모용이 덕망이 높은 인물이 되었다.) 

059 陶侃爲廣州刺史, 在州無事, 輒朝運百甓於齋外, 莫運於齋內. 入問其故. 答曰, 吾方致力中原. 過爾優逸, 恐不堪事. 其勵志勤力, 皆此類也. 後爲荊州刺史. 侃性聰敏, 勤於吏職, 恭而近禮, 愛好人倫. 終日斂膝危坐, 閫外多事, 千諸萬端, 罔有遺漏, 遠近書疏, 莫不手答, 筆翰如流, 未嘗壅滯, 引接疏遠, 門無停客. 常語人曰, 大禹聖人, 乃惜寸陰. 至於衆人, 當惜分陰. 豈可逸遊荒醉, 生無益於時, 死無聞於後. 是自棄也. 諸參佐或以談戱廢事者, 乃命取其酒器蒱博之具, 悉投之于江, 吏將則加鞭扑, 樗蒱者, 牧猪奴戱耳. 老莊浮華, 非先王之法言. 不可行也. 君子當正其衣冠, 攝其威儀. 何有亂頭養望, 自謂弘達耶.

060 王勃楊炯盧照鄰駱賓王, 皆有文名. 謂之四傑. 裵行儉曰, 士之致遠, 先器識, 而後文藝. 勃等雖有文才, 而浮躁淺露. 豈享爵祿之器耶. 楊子沈靜, 應得令長, 餘得令終爲幸. 其後, 勃溺南海, 照鄰投潁水, 賓王被誅, 炯終盈川令. 皆如儉之言.

061 孔戡於爲義, 若嗜慾, 不顧前後, 於利與祿, 則畏避退怯, 如懦夫然.

062 柳公綽居外藩. 其子每入境, 都邑未嘗知, 旣至, 每出入, 常於戟門外下馬, 呼幕賓爲丈, 皆許納拜, 未嘗笑語款洽.

063 柳仲郢以禮律身, 居家無事, 亦端坐拱手, 出內齋未嘗不束帶. 三爲大鎭, 廐無良馬, 衣不薰香, 公退必讀書, 手不釋卷. 家法在官, 不奏祥瑞, 不度僧道, 不貸臟吏法, 凡理藩府, 急於濟貧卹孤, 有水旱, 必先期假貸, 廩軍食, 必精豐, 逋租必貰免, 舘傳必增飾, 宴賓犒軍必華盛, 而交代之際, 食儲帑藏, 必盈溢於始至, 境內有孤貧衣纓家女, 及笄者, 皆爲選壻, 出俸金爲資裝, 嫁之.

064 柳玭曰, 王相國涯, 方居相位, 掌利權. 竇氏女歸, 請曰, 玉工貨一ਥ. 奇巧. 須七十萬錢. 王曰, 七十萬錢我一月俸金耳. 豈於女惜. 但一ਥ七十萬. 此妖物也. 必與禍相隨. 女子不復敢言. 數月女自婚姻會歸, 告王曰, 前時ਥ爲馮外郞妻首飾矣. 乃馮球也. 王嘆曰, 馮爲郎吏, 妻之首飾有七十萬錢. 其可久乎. 馮爲賈相餗門人. 最密. 賈有蒼頭頗張威福, 馮召而勗之. 未浹旬馮晨謁賈, 有二靑衣捧地黃酒, 出飮之, 食頃而終. 賈爲出涕, 竟不知其由. 又明年王賈皆遘禍. 噫, 王以珍玩奇貨爲物之妖. 信知言矣. 徒知物之妖, 而不知恩權隆赫之妖, 甚於物耶. 馮以卑位貪寶貨, 已不能正其家, 盡忠所事, 而不能保其身. 斯亦不足言矣. 賈之臧獲, 害門客于牆廡之間, 而不知. 欲終始富貴, 其可得乎. 此雖一事, 戒臧數端.

065 王文正公發解南省廷試, 皆爲首冠. 或戱之曰, 狀元試三場. 一生喫著不盡. 公正色曰, 曾平生之志, 不在溫飽.

066 范文正公少有大節. 其於富貴貧賤, 毁譽歡戚, 不一動其心, 而慨然有志於天下. 嘗自誦曰, 士當先天下之憂而憂, 後天下之樂而樂也. 其事上, 遇人, 一以自信, 不擇利害爲趨捨. 其有所爲, 必盡其方, 曰, 爲之自我者, 當如是. 其成與否, 有不在我者. 雖聖賢不能必. 吾豈苟哉.
        범문정공은 젊어서부터 큰 절개가 있어, 부귀와 빈천, 훼예와 환척에 한번도 그 마음을 동요시킨 적이 없고 강개한 마음으로 천하에 뜻을 두었다. 일찍이 스스로 말하기를, "선비는 응당 천하의 근심에는 앞서서 근심해야 하고 천하의 즐거움에는 나중에 즐거워해야 한다."하였다. 윗사람을 섬기고 사람들을 대우함에 한결같이 곧은 신념으로써 하여, 이익과 손해를 가려 취하거나 버리는 일을 하지 않았으며, 하는 일에는 반드시 모든 방법을 다하며 말하기를, "일을 함에 내가 해야 할 일은 마땅히 이렇게 해야 한다. 그 일이 이루어지느냐 이루어지지 않느냐 하는 것은 내가 결정할 수 없는 게 있다. 비록 성현일지라도 기필할 수 없는데, 내가 어찌 구차히 하겠는가." 하였다.

067 司馬溫公嘗言, 吾無過人者. 但平生所爲, 未嘗有不可對人言者耳
    (사마온공 상언. 오무과인자. 단평생소위, 미상유불가대인언자이).
        사마온공이 일찍이 말하였다.
        "나는 남들보다 나은 것이 없다. 다만 평생 한 일이, 다른 사람 앞에서 말할 수 없는 일은 아직 한번도 하지 않았을 뿐이다."

068 管寧嘗坐一木榻. 積五十餘年, 未嘗箕股. 其榻上當膝處皆穿.

069 呂正獻公自少謹學, 卽以治心養性, 爲本, 寡嗜慾, 薄滋味, 無疾言遽色, 無窘步, 無惰容, 凡嬉笑俚近之語, 未嘗出諸口, 於世利紛華聲伎游宴, 以至於博奕奇玩, 淡然無所好.

070 明道先生終日端坐, 如泥塑人. 及至接人, 則渾是一團和氣.

071 明道先生作字時, 甚敬. 嘗謂人曰, 非欲字好. 卽此是學.

072 劉忠定公見溫公, 問盡心行己之要, 可以終身行之者. 公曰, 其誠乎. 劉公問, 行之何先. 公曰, 自不忘語始. 劉公初甚易之. 及退而自檃栝日之所行與凡所言. 自相掣肘矛盾者多矣. 力行七年以後成. 自此言行一致. 表裏相應, 遇事坦然, 常有餘裕.

073 劉公見賓客, 談論踰時, 體無攲側, 肩背竦直, 身不少動, 至手足, 亦不移.

074 徐積仲車初從安定胡先生學. 潛心力行, 不復仕進, 其學以至誠爲本, 事母至孝. 自言, 初見安定先生, 退頭容少偏. 安定忽厲聲云, 頭容直, 某因自思, 不獨頭容直. 心亦要直也. 自此不敢有邪心. 卒諡節孝先生.

075 文中子之服儉以絜, 無長物焉. 綺羅錦繡不入于室, 曰, 君子非黃白不御. 婦人則有靑碧.

076 柳玭曰, 高侍郞兄弟三人, 俱居淸列, 非速客, 不二羹胾, 夕食齕蔔匏而已.

077 李文靖公治居第於封丘門外, 廳事前僅容旋馬. 或言, 其太隘, 公笑曰, 居第當傳子孫. 此爲宰輔廳事誠隘, 爲太祝奉禮廳事, 則已寬矣.

078 張文節公爲相, 自奉如河陽掌書記時. 所親故規之曰, 今公受俸不少, 而自奉若此. 雖自信淸約, 外人頗有公孫布被之譏. 公宜少從衆. 公嘆曰, 吾今日之俸, 雖擧家錦衣玉食, 何患不能. 顧人之常情, 由儉入奢易, 由奢入儉難. 吾今日之俸, 豈能常有, 身豈能常存. 一旦異於今日, 家人習奢已久. 不能頓儉, 必至失所. 豈若吾居位去位身存身亡如一日乎.

079 溫公曰, 先公爲群牧判官, 客至, 未嘗不置酒. 或三行, 或五行, 不過七行, 酒沽於市, 果止梨栗棗柿. 肴止脯醢菜羹. 器用*자漆. 當時士大夫皆然. 人不相非也. 會數而禮勤, 物薄而情厚. 近日士大夫家, 酒非內法, 果非遠方珍異, 食非多品, 器皿非滿案, 不敢會賓友, 常數日營聚, 然後敢發書. 苟或不然, 人爭非之, 以爲鄙吝. 故不隨俗奢靡者鮮矣. 嗟乎, 風俗頹弊如是. 居位者, 雖不能禁, 忍助之乎.

080 溫公曰, 吾家本寒族. 世以淸白相承, 吾性不喜華靡, 自爲乳兒時, 長者加以金銀華美之服, 輒羞赧棄去之. 年二十忝科名, 聞喜宴獨不戴花. 同年曰, 君賜. 不可違也. 乃簪一花. 平生衣取蔽寒, 食取充腹, 亦不敢服垢弊, 以矯俗干名. 但順吾性而已.

081 汪信民嘗言, 人常咬得菜根, 則百事可做. 胡康侯聞之, 擊節嘆賞. 右, 實敬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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