代 |
왕명 |
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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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위기간 |
약사 |
1 |
혁거세왕 (赫居世王) 혁거세거서간(赫居世居西干) BC69~AD4 |
박혁거세 (朴赫居世) |
BC57 ~AD4년 |
13세에 왕위에 올라 나라 이름을
'서라벌'이라함. 왕21년에는 수도를 금성(金城)이라 하고 성을 쌓아
국가의 기초를 세움. BC27년 천일창(天日槍)이 왜(일본)땅으로 가고,
신라의 도공이 왜에 건너가서 신라식 도자기 제작. |
2 |
남해왕 (南解王) 남해차차웅 (南解次次雄) 남해거서간 ?~24 |
박남해 (朴南解) |
4~24년 |
혁거세 거서간의 맏아들. 석탈해(昔脫解,
탈해왕)를 사위로 삼아 정사를 맏겼다함. 병선 100여척으로 왜구 격퇴. |
3 |
유리왕 (儒理王) 유리이사금 (瑠璃尼師今) 노례이사금 (弩禮尼師今) ?~57 |
박유리 (朴儒理) |
24~57년 |
남해왕 차차웅의 아들. 32년 6부(部)의 이름을
고치고 성이(李)·최(崔)·손(孫)·정(鄭)·배(裵)·설(薛)의
성(姓)을 내렸으며 신라 가악의 기원 인 '도솔가' 등을 지음 관계를
17등으로 제정하였다. |
4 |
탈해왕 (脫解王) 탈해이사금 (脫解尼師今) BC19~80 |
석탈해 (昔脫解). |
57~80년 |
남해왕 차차웅의 부마, 용성국(龍城國) 왕의
아들. 65년 국호를
계림(鷄林)이라 고침. 신라김씨의 시조 김알지(金閼智) 탄생. |
5 |
파사왕 (波娑王) 파사이사금 (婆娑尼師今) ?~112 |
박파사 (朴婆娑) |
80~112년 |
유리왕 아들. 월성을 쌓아 백성을
옮겨 살게하고, 여러나라를 병합하여 국위를 떨침. |
6 |
지마왕 (祗摩王) 지마이사금 (祗摩尼師今) ? |
박지마 (朴祗摩) |
112~134년 |
파사왕의 맏아들. 백제의 협조로
말갈을 물 리쳤음. 지미왕(祗味) |
7 |
일성왕 (逸聖王) 일성이사금 (逸聖尼師今) ? |
박일성 (朴逸聖) |
134~154년 |
아버지는 유리왕의 형, 박천일창(朴天日昌). 농본정책으로
경지를 개간하고 백성의 사치를 금함. |
8 |
아달라왕 (阿達羅王) 아달라이사금 (阿達羅尼師今) ?~184 |
박아달라 (朴阿達羅) |
154~184년 |
일성왕의 맏아들. 현(縣)의 설치와 도로개통등 내치에 힘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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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
벌휴왕 (伐休王) 벌휴이사금(伐休尼師今) ?~196 |
석벌휴 (昔伐休) |
184~196년 |
탈해왕의 손자. 간(角干)
구추(仇鄒)의 아들. |
10 |
내해왕 (奈解王) 나해이사금 (奈解尼師今) ?~230 |
석내해 (昔奈解) |
196~230년 |
벌휴왕의 손자. 이가(伊賈)의
아들. |
11 |
조분왕 (助賁王) 조분이사금 (助賁尼師今) ?~247 |
석조분 (昔助賁) |
230~247년 |
제귀왕(諸貴). 벌휴왕의 손자. 갈문왕(葛文王)
골정(骨正)의 아들. |
12 |
첨해왕 (沾解王) 첨해이사금 (沾解尼師今) ?~261 |
석첨해 (昔沾解) |
247~261년 |
벌휴왕의 손자, 조분왕의 동생.
고구려와 국교를 통함. |
13 |
미추왕 (味鄒王) 미추이사금 (味鄒尼師今) ?~284 |
김미추 (金味鄒) |
262~284년 |
구도의 아들, 김씨 왕가의 시조, 알지(閼智)의 육대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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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
유례왕 (儒禮王) 유례이사금 (儒禮尼師今) ?~298 |
석유례 (昔儒禮) |
284~298년 |
조분왕의 맏아들. 백제와 수교함. |
15 |
기림왕 (基臨王) 기림이사금 (基臨尼師今) 289~310 |
석기림 (昔基臨) |
298~310년 |
조분왕의 둘째 아들. 307년에
국호를 신라(新羅)로 고침. |
16 |
흘해왕 (訖解王) 흘해이사금 (訖解尼師今) ?~356 |
석흘해 (昔訖解) |
310~356년 |
내해왕(奈解王)의 손자. 기림왕이 후사가 없이 죽자 군신들의
추대로 즉위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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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
내물왕 (奈勿王) 내물마립간 (柰勿麻立干) ?~402 |
김내물 (金奈勿) 김나밀 (金那密) |
356~402년 |
각간(角干) 말구(末仇)의 아들. 마립간을 왕의 칭호로
사용. 중국문물 수입에 힘씀. 나밀왕(那密)이라고도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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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
실성왕 (實聖王) 실성마립간 (實聖麻立干) ?~417 |
김실성 (金實聖) |
402~417년 |
이찬(伊飡) 대서지(大西知)의 아들. 내물왕이 죽은 후 백성들의 추대로
즉위. 내물왕의 어린 태자 눌지를 시기하여 죽이려다 도리어 피살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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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
눌지왕 (訥祗王) 눌지마립간 (訥祗麻立干) ?~458 |
김눌지 (金訥祗) |
417~458년 |
내물왕의 아들. 실성왕의 사위.
438년 우차법(牛車法)을 제정했다. 백제와
공수동맹을 맺고 고구려를 공격했다. 458년 고구려의 묵호자(墨胡子)가
불교를 전파. |
20 |
자비왕 (慈悲王) 자비마립간 (慈悲麻立干) ?~479 |
김자비 (金慈悲) |
458~479년 |
눌지왕의 맏아들이다.
부자상속제에 따라 즉위한 뒤, 왕권강화책으로 469년 경주(慶州)를 지역적으로 구분하여 방리명(坊里名)을 확정하였다.
대외적으로는 고구려의 남진정책에 대비, 백제와의 공수동맹(攻守同盟)을 강화하였다.
474년 고구려의 장수왕(長壽王)이 백제를 공격하는 등 군사적 위협이 증대함에 따라 일모성(一牟城)·사시성(沙尸城)·광석성(廣石城) 등 요새지에 산성을 축조하여 이에 대비하였다.
그 밖에 왜의 침입에 대비하여 연해지방에 성을 쌓았다. 467년에는 병선(兵船)을 정비하였다.
[왕17년에 고구려가 백제를 공격하자
나제동맹을 맺음.] |
21 |
소지왕 (炤知王) 소지마립간 (炤知麻立干) ? |
김소지 (金炤知) |
479~500년 |
자비왕의 맏아들.
481년 고구려와 말갈(靺鞨)의 침입을 백제·가야(伽倻)와
연합하여 물리쳤다. 484년 고구려의 재침을 받아다시 백제군과 연합하여 모산성(母山城)에서 격퇴하였다. |
22 |
지증왕 (智證王) 지증마립간 (智證麻立干) 437~514 |
김지대로 (金智大路, 金智度路) |
500~514년 |
갈문왕(葛文王)
습보(習寶)의 아들. 왕이라는
칭호를 처음 사용함. 이사부(異斯夫)가 우산국(于山國, 울릉도)을 점령함. |
23 |
법흥왕 (法興王) ?~540 |
김원종 (金原宗) |
514~540년 |
지증왕의 아들. 514년 아시촌(阿尸村)에
소경(小京) 설치. 율령(律令) 반포. 528년 이차돈(異次頓) 순교.
532년
금관가야(伽倻) 멸망시킴. 536년 처음으로 연호를 건원(建元)이라함. |
24 |
진흥왕 (眞興王) 534~576 |
김삼맥종 (金彡麥宗) |
540~576년 |
갈문왕(葛文王)
입종(立宗)의 아들. 황룡사(皇龍寺)
건립을 시작. 555년 북한산 진흥왕순수비, 561년 창녕 진흥왕순수비,
568년 황초령 진흥왕순수비와 마운령 진흥왕순수비 건립. 562년 대가야(大伽倻)
멸망시킴 |
25 |
진지왕 (眞智王) ? |
김사륜 (金舍輪) 김금륜 (金金輪) |
576~579년 |
진흥왕의 둘째 아들. 중국의 진나라와 수교하였다. |
26 |
진평왕 (眞平王 ?~632 |
김백정 (金伯淨, 金白淨) |
579~632년 |
진흥왕의 손자, 동륜(銅輪)의
아들. 수(隋)나라, 당(唐)나라와 수교하였다. |
27 |
선덕여왕 (善德女王) ? |
김덕만 (金德曼) |
632~647년 |
진평왕 맏딸.
경주 첨성대, 황룡사 구층석탑 건립. |
28 |
진덕여왕 (眞德女王) ?~654 |
김승만 (金勝曼) |
647~654년 |
갈문왕(진평왕의 아우) 국반(國飯)의 딸 신라시대 3여왕 중 한 사람으로 자질과 미모를 겸비하였다고 전해진다.
즉위하자 곧 선덕여왕 말년에 반란을 일으켰던 비담(毗曇) 등 30명을 처형하고 알천(閼川)을 상대등에 임명하여 정치적 안정을 꾀하였다. 대외적으로는 당(唐)나라와 외교관계를 지속함으로써 고구려·백제를
견제하였고, 대내적으로 김유신(金庾信)을 중심으로 백제의 공격을
막고, 국력을 강화하여 3국통일의 기초를 다져갔다. |
29 |
무열왕 (武烈王) 604~661 |
김춘추 (金春秋) |
654~661년 |
태종무열왕(太宗武烈).
진지왕(眞智王)의 손자로. 이찬(伊飡) 용춘(龍春 또는 龍俊)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진평왕(眞平王)의 딸인 천명부인(天明夫人)이고, 비는 김유신(金庾信)의 누이동생 문명부인(文明夫人)이다.
화백회의(和白會議)에서 왕으로 추대되어 최초의 진골출신 왕이 되었다.
웅변에 능하고 외교수단이 뛰어나 사신으로 여러 차례 당(唐)나라에 파견되어 외교성과를 거두었다.
642년(선덕여왕 11) 백제의 침입으로 대야성(大耶城)이 함락되고 사위인 성주(城主) 김품석(金品釋)이 죽은 뒤 백제에 보복하고자 고구려에 원병을 청하러 갔으나 한강 상류유역의 영토반환문제로 오히려 억류되었다가 돌아왔다.
김유신(金庾信) 등과 함께 정병(精兵) 5만 명을 이끌고 본격적인 백제정벌에 나서 7월 백제를 멸망시켰다.
661년 고구려를 정벌하고자 군사를 일으켰으나 삼국통일을 완성하지 못하고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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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
문무왕 (文武王) ?~681 |
김법민 (金法敏) |
661~681년 |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의 맏아들로서 어머니는 김유신(金庾信)의 누이인 문명왕후(文明王后)이다.
650년(진덕여왕 4) 왕명으로 당(唐)나라에 가서
대부경(大府卿) 벼슬을 받았다. 654년(무열왕 1) 파진찬(波珍飡)으로 병부령(兵部令)이 되었다.
660년(무열왕 7) 당(唐)의 소정방(蘇定方)이 백제를 공격하려고 군사를 이끌고 오자 김유신과
함께 당군과 연합하여 백제를 멸망시켰다. 666년에는 고구려 정벌에 착수, 당나라에 군사적 도움을 요청, 이적(李勣)이 요동행군(遼東行軍)의 대총관(大摠管)으로 왔으며,
667년 김유신과 함께 고구려 정벌에 나섬. 668년 8월 당군과 합세하여
평양을 함락, 고구려를 멸망시켰다.(왕17년에
백제, 고구려를 멸망시켜 삼국통일). 죽은 뒤 시체는 유언대로 화장하여 동해
대왕암(大王巖) 가운데 물 속에 안장(安葬)하고, 바닷가에 감은사(感恩寺)를 세웠다. 김유신(575~673)
죽음. |
31 |
신문왕 (神文王) ?~692 |
김정명 (金政明) 김명지 (金明之) |
681~691년 |
문무왕의
아들. 만파식적을 만듬. |
32 |
효소왕 (孝昭王) 643~702 |
김이홍 (金理洪) 김이공 (金理恭) |
692~702년 |
신문왕의
맏아들. 692년 설총이 이두(吏讀)를 정리. |
33 |
성덕왕 (聖德王) ?~737 |
김흥광 (金興光) 김융기 (金隆基) |
702~737년 |
723년 혜초가
서역(西域)에서 돌아와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을 저술. |
34 |
효성왕 (孝成王) ?~742 |
김승경 (金承慶) |
737~742년 |
성덕왕의 둘째
아들 |
35 |
경덕왕 (景德王) ?~765 |
김헌영 (金憲英) |
742~765년 |
751년 대상(大相)
김대성(金大成)이 불국사(佛國寺) 창건. |
36 |
혜공왕 (惠恭王) 765~780 |
김건운 (金乾運) |
765~780년 |
경덕왕의 아들.
8세에 즉위하여 여자 놀이를 하며 여자처럼 행동을 함.
대공의 난(大恭 亂), 김지정의 난(金志貞 亂) 등으로 나라가 어지러웠으며
선덕왕에게 피살됨. 770년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鐘) 주조. |
37 |
선덕왕 (宣德王) ?~785 |
김양상 (金良相) |
780~785년 |
해찬(海飡)
효방(孝芳)의 아들 내물왕의 10세손 당나라에
조공을 받침. |
38 |
원성왕 (元聖王) ?~798 |
김경신 (金敬信) |
785~798년 |
김주원(金周元)이 냇물이 넘쳐 궁에 못들어가자,
김경신(원성왕)이 먼저 궁에 들어가 왕이됨. 788년 처음으로 독서출신과(讀書出身科)를 설치. |
39 |
소성왕 (昭聖王) ?~800 |
김준옹 (金俊邕) |
798~800년 |
원성왕의 태자인
인겸(仁謙) 의 아들. 2년만에 죽자 이후에 왕위 쟁탈전이 벌어
졌음. |
40 |
애장왕 (哀莊王) 788~809 |
김청명 (金淸明) 김중희 (金重熙) |
800~809년 |
13세에 즉위, 섭정하던 숙부
김언승(金彦昇)에게 왕위 빼앗기고 시해됨. 해인사 창건. |
41 |
헌덕왕 (憲德王) ?~826 |
김언승 (金彦昇) |
809~826년 |
조카를 죽이고
왕이됨, 친당정책. 백영(白永)에 명하여 패강(浿江)에 300리나
되는 장성을 쌓음. |
42 |
흥덕왕 (興德王) ?~836 |
김수종 (金秀宗) 김경휘 (金景徽) |
826~836년 |
원성왕의 손자며 헌덕왕의 아우. 828년 완도에 청해진을 만들어 장보고(長保皐)에게
관리토록 함. |
43 |
희강왕 (僖康王) ?~838 |
김제륭 (金悌隆) |
836~838년 |
원성왕의 손자,
흥덕왕이 후사(後嗣) 없이 죽자, 삼촌인 균정(均貞)을 죽인
후 왕위에 올랐으나,
그를 도운 김명(金明)등이 난을 일으키자 자살함. |
44 |
민애왕 (閔哀王) ?~839 |
김명 (金明) |
838~839년 |
원성왕의 증손,
대아찬 충공(忠恭)의 아들. 시중(侍中)으로 있을
때 흥덕왕이 죽자, 김제륭(悌隆)을 왕으로 내세우고 스스로 상대등(上大等)이 되었다가
희강왕을 죽게하고 왕이됨. |
45 |
신무왕 (神武王) ?~839 |
김우징 (金祐徵) |
839년 |
원성왕의 증손, 839년
4월 청해진대사(淸海鎭大使) 장보고(張保皐)의 지원으로 민애왕을
죽이고 왕이 되었으나, 수개월 뒤 병사하였다함. |
46 |
문성왕 (文聖王) ? |
김경응 (金慶膺) |
839~857년 |
신무왕의 태자,
841년 일길찬(一吉飡) 홍필(弘弼)이 반란 845년 장보고(張保皐) 반란을
일으켰으나 좌절 후 846년(문성왕 8) 염장(閻長)에게 피살됨. |
47 |
헌안왕 (憲安王) ?~861 |
김의정 (金誼靖) 김우정 (金祐靖) |
857~861년 |
신무왕의 이복동생, 후사가 없어
왕족 응렴(膺廉)을 사위 삼고 왕위를 물려줌. |
48 |
경문왕 (景文王) ?~875 |
김응렴 (金膺廉) |
861~875년 |
아찬(阿飡) 계명(啓明)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신무왕의
딸인 광화부인(光和夫人)이다.
희강왕(僖康王)의 손자이고, 왕비는 헌안왕(憲安王)의 딸 문의왕후(文懿王后)이다. 왕위에 오르기 전에 일찍이 국선(國仙)이 되었으며 불교에 관심이
많았다. |
49 |
헌강왕 (憲康王) ?~886 |
김정 (金晸) |
875~886년 |
경문왕의 아들,
처용무(處容舞)가 유행하고,
사회가 사치와 환락에 빠져듬. 신라는 이때 부터 쇠퇴기가 시작. |
50 |
정강왕 (定康王) ?~887 |
김황 (金晃) |
886~887년 |
경문왕의 둘째
아들, 헌강왕의 동생, 진성여왕의 오빠. 몸이 약해서 즉위 2년만에 죽음 |
51 |
진성여왕 (眞聖女王) ?~897 |
김만 (金曼) 김원 (金垣) |
887~897년 |
3명의 여왕(女王)
중 마지막 여왕이다. 경문왕의 딸, 헌강왕·정강왕의 여동생이다. 음행(淫行)을
일삼고 병제(兵制)가 퇴폐하여 나라가 혼란에 빠짐 |
52 |
효공왕 (孝恭王) ?~912 |
김요 (金嶢) |
897~912년 |
헌강왕의 서자,
정강왕의 아들.
궁예와 견훤(후백제)에게 많은 영토를 빼앗기고 정사를 돌보지 않아 후삼국이
정립되는 것을 막지 못함. |
53 |
신덕왕 (神德王) ?~917 |
박경휘 (朴景暉, 朴景徽) |
913~917년 |
아달라왕(阿達羅王)의 원손(遠孫), 대아찬(大阿湌)
예겸(乂兼)의 아들. 효공왕이
후사가 없이 죽자, 백성의 추대를 받아 즉위함 |
54 |
경명왕 (景明王) ?~924 |
박승영 (朴昇英) |
917~924년 |
신덕왕의
태자. 즉위 후 쇠퇴한 국운을 건지려 후당(後唐)에 구원을
요청하였으나
실패. |
55 |
경애왕 (景哀王) ?~927 |
박위응 (朴魏膺) |
924~927년 |
신덕왕의 아들. 927년 포석정(鮑石亭)에서 연회를 하다가 견훤(후백제)의 습격을 받자 자살함. |
56 |
경순왕 (敬順王) ?~978 |
김부 (金傅) |
927~935년 |
문성왕의 6대손,
이찬(伊飡) 효종(孝宗)의 아들. 경애왕이 죽은
후 견훤(후백제)에 의하여 즉위하였으나, 935년에 왕건(고려)에 항복하여 왕건의 딸
낙랑공주와 결혼하여 경주 사심관(事審官)으로 여생을 보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