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정씨는 신라 초기의 6촌(六村) 가운데
취산 진지촌장(珍支村長)의 지백호(智伯虎)를 시조로 하고 있다.
그는 다른 5촌장과 함께 박혁거세(朴赫居世)를 왕으로 추대하고 좌명공신으로
낙랑후(樂浪候)에 봉해졌으며, 제3대 유리왕(儒理王) 때 정씨(鄭氏)로 사성(賜姓)되었다.
그 후 그의 42세손 정진후(鄭珍厚, 시호 文正)가 고려조에 문과에 급제,
금자광록대부·정당문학·병부상서 겸 군기시윤·평장사(平章事) 등을
지내고 월성군(月城은 지금의 경주)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그를 득관중조로 하고, 본관을 경주로 하여 세계를 이여 오고 있다.
이렇게 경주정씨는 옛 본피부(本彼部) 사람들의 정통 후손이요, 이른바 모든
정씨의 '큰집' 격으로 오랜 옛날부터 우리나라 동남안에 자리잡고
살았던 선주민의 후예이다. 그러나 신라시대의 명벌로서 신라에서
고려에 이르는 천년동안 장상의 세가였다고 하지만 문헌의 실전으로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중조 정진후의 묘소는 경북 월성군 내남면
노곡리에 있고, 매년 음력 10월 10일에 향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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