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의정에 추증된 이정화(廷華)의 아들이다.
1582년(선조 15) 생원(生員)이 되고 강릉참봉(康陵參奉)을 거쳐
1592년 임진왜란(壬辰倭亂)에 삼도소모관(三道召募官)·삼도선유관(三道宣諭官)으로 군졸과 우마와 군량을 징발하여, 도체찰사(都體察使) 류성룡(柳成龍)에게 수송했다. 1603년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형조좌랑(刑曹佐郞),
안산군수(安山郡守), 양재도찰방(良才道察訪) 등을 지냈다.
1609년(광해 1) 함흥판관(咸興判官)을 거쳐 숙천부사(肅川府使) 때 수감된 해주목사(海州牧使) 최기(崔沂)를 만난 죄로 이천(伊川)에 귀양갔고, 풀려나와 평산부사(平山府使)가 되었으나 광해군의 폭정을 개탄, 1523년 김류(金瑬)와 함께 광해군을 폐하고 선조의 손자 능양군(綾陽君,
仁祖)을 추대하여(인조반정(仁祖反正)) 호위대장(扈衛大將)·이조참판 겸 의금부동지사(義禁府同知事)·좌찬성(左贊成)이 되었고, 정사공신 1등(靖社功臣
一等)으로 연평부원군(延平府院君)에 봉해지고 공서(功西)의 영수가 되었다.
1626년(인조 4) 병조판서·이조판서를 지내고, 같은 해 김장생(金長生)과 인헌왕후(仁獻王后)의 상(喪)을 만 2년으로 주장하다가 대간의 탄핵을 받아 사직했다. 다음해 정묘호란(丁卯胡亂) 때 왕을 강화도에 호종하고 최명길(崔鳴吉)과 화의(和義)를 주장하다가 대간의 탄핵을 받았다.
영의정에 추증되고, 인조(仁祖)의 묘정(廟庭)에 배향(配享)되었다.
저서에 "묵재일기(默齋日記)", 편저에 "한음공언행록(漢陰公言行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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