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참찬 허흡(許洽)의 손자이고,
허응(許凝)의 아들이다.
1572년(선조 5) 춘당대문과(春塘臺文科)에 병과로 급제하였고,
현감 때부터 치적을 쌓고 1591년(선조 24) 공주목사가 되었다.
이듬해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금강을 굳게 지켜서 호서·호남 지방을 안전하게 하였고,
승장(僧將) 영규(靈圭)를 불러 도내의 승군을 가려뽑게 하여 장수로 삼아
의병장 조헌(趙憲)과 함께 청주성을 탈환하는데 전공을 세웠다.
1593년 충청도관찰사가 되고, 한양 수복을 위하여 군대를 통진(通津)·독산성(禿山城) 등지로 주둔시키다가
도원수 권율(權慄)로부터 내포(內浦)가 풍년임에도 불구하고 군량을 변통치 못한다고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곧 이조의 요청과 류성룡(柳成龍)의 추천으로 형조참의에 임명되고,
청량사(請糧使)로 명나라에 건너가 산동지방의 곡식 2만2700섬을 얻어왔다.
그뒤 강계부사로서 여진족의 움직임을 정탐하여 보고하고,
의주부윤·평안도관찰사·병조참판 등을 지냈으며 1604년 이조판서가 되었다.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불타고 남은 역대의 실록을 다시 인출(印出)하여
사고(史庫)에 봉안(奉安)할 때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로 활약하였다.
그뒤 한성부판윤에 특배(特拜)되었다가 다시 평안도관찰사를 거쳐 호조판서가 되었으며,
1606년(선조 39) 우의정에 올랐고, 이어 좌의정이 되었다.
1608년(광해 1)에는 유영경(柳永慶)의 일파로 몰려 파직되었고,
이어 능창군 전(綾昌君 佺)의 추대사건에 관련되어 1616년(광해 8) 원주에 부처(付處)되었으며,
1618년 유배지인 원주에서 70세를 일기로 별세 하였다.
인조반정(仁祖反正) 후에 관작이 복구되었다.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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