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총제(都摠制) 김추(錘)의 아들이다.
1405년(태종 5) 문과에 급제, 1419년(세종
1) 사간원 우정언(司諫院右正言)이 되고 세종 5년 진제 경차관ㆍ지평(持平), 세종 8년 집의(執義),
세종 11년 우부대언(右副代言)을 지냈다. 1433년 함길도 도관찰사(咸吉道都觀察使)가
되어 야인들의 변경 침입을 격퇴했고, 6진을 설치하여 두만강을 경계로
국경선을 확정했으며, 1435년 함길도 병마도절제사(咸吉道兵馬都節制使)를 겸직, 야인의 정세를
탐지 보고하여 그 비변책을 건의했고, 1440년 형조와 예조의 판서를
지낸 후 1446년 우참찬(右參贊)이 되었다. 1449년 권제(權嗇)등이
수교한 '고려사'가 공정하지 못하여 개찬하게 되자 지춘추관사로
그 총책임을 맡아 1451년 간행했다. 평안도 도절제사를 거쳐
1450년
좌찬성(左贊成)으로 평안도 도체찰사를 겸직, 이듬해 우의정에 오르고,
1452년
'세종실록'의 편찬을 감수하여 진행했다. 이해
12세의 단종(端宗)이 즉위하자 좌의정으로 황보인(皇甫仁),
정분(鄭苯) 등과 함께 어린 왕을
보필했다. 문종의 유명으로 단종을 협찬하던 재상 가운데 대호(大虎)라는 별명까지
붙은 지용을 겸비한 명시으로 왕위를 노리던 수양대군(首陽大君, 세조)에 의해 1453년(단종 1)
두 아들과 함께 격살(擊殺), 대역모반죄(大逆謀叛罪)로 효시됨으로써 계유정난(癸酉靖難)의 제1차
희생자가 되었다. 1746년(영조 22) 복관(復官)되었다.
일찍이 '고려사' 개찬의 총지휘를
맡았으나 정인지(鄭麟趾)가
총재관으로 기록 되어 있는 것은 대역모반죄로 말미암아
삭제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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