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 김여물(汝岉)의 아들이다.
송익필(宋翼弼)의 문인.
아버지가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충주에서 전사하여 순절자의 아들로 참봉에 기용되고, 1596년(선조 29)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승문원 벼슬을 거쳐 선조 34년 검열이 되었다. 1612년(광해
4) 교리로 강계부사가 되고, 1613년(광해 6) 가선대부에 올랐으며,
1617년(광해
9)에는 폐모론 때는 정청에 참여하지 않아 대간의 탄핵을 받고 낙향했다.
서인으로 1623년(인조 1) 이귀(李貴),
최명길(崔鳴吉),
이괄(李适)등과 함께
창의문 밖에서 군사를 일으켜 대북정권을 타도 광해군을 폐한후 능양군을
왕으로 추대하여 정사공신 1등(靖社功臣
一等)으로 승편부원군에 봉해지고, 병조판서
겸 대제학이 되었다. 이듬해 병조판서로서 이괄의 난(李适-亂)의 평정에
힘썼고, 우찬성을 지낸 뒤, 1625년(인조 2) 이조 판서가 되었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丁卯胡亂)에는
부제찰사로서 인조를 강화에 호종, 환도한 뒤에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이
되었다. 1631년 인조의 아버지 정원군을 원종으로 추숭하는 것을
반대하다가 면직되었다. 2년 후 다시 좌의정에 임명되고, 1636년
영의정에 승진, 이 해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왕을 남한산성에 호종, 이듬해
환도 후 화의를 주장한 진소가 잘못되었다는 양사의 논핵으로 삭직되었다.
1644년(인조 22) 심기원의 목역을 신속히 평정한 공으로 다시 영의정에 올라 영국공신
1등(寧國功臣 一等)에 순천부원군이 되고, 이듬해 병으로 사직했다가 다시 영의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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