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7년(조선 인조 5)에 후금(後金, 淸)의 침입으로 일어난
싸움이다.
광해군을 몰아 내고 즉위한 인조(仁祖)가 향명배금(向明排金, 친명배금) 정책(政策)을
쓰고, 명(明)나라 장군 모문룡(毛文龍)이 철산(鐵山)의 가도(椵島)에 진을 치고 요동 회복을 꾀하자,
중국 대륙으로의 진출을 꾀하던 후금(後金, 淸)이 그들의 배후를 위협하는 조선을
먼저 침입했다. 후금(後金, 淸)의 태종은 광해군의 폐위를 구실로 군사를 일으켜
의주, 정주, 곽산을 거쳐 황해도 평산에까지 이르렀다. 그 사이에 정봉수(鄭鳳壽)와
이입 등이 의병을 조직하여 용골산성(평안북도 용천)과 의주 지방에서 적과 싸웠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인조(仁祖)는 강화로 피하게 되었다. 그러나
후금(後金, 淸)은 본래 중국 대륙을 차지하는 것이 목적이었으므로 조선과 쉽게
화약이 이루어져 형제의 맹약을 맺고 군대를 철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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