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감 윤형갑(衡甲)의 아들이다.
1627년(인조 5) 생원이 되었고, 1631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632년 설서가 되었고
1636년(인조 14) 이조정랑(吏曹正郞)·교리(校理)를 지낼 때 병자호란이 일어났다.
왕이 남한산성으로 피하고 산성이 포위되어 정세가 불리해져 최명길(崔鳴吉) 등이 화의를 주장하였으나 오달제(吳達濟) 등과 함께 이를 극렬히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 결국 화의가 이루어지자 오달제(吳達濟), 홍익한(洪翼漢)과 함께 자진하여 소를 올려 척화론자로 청나라에 잡혀가 갖은 고문을 받았다. 청나라에서 고문과 회유로 그 뜻을 돌리려 하였으나 끝내 굴하지 않았고 결국 선양(瀋陽) 서문(西門) 밖에서 사형되었다. 오달제(吳達濟), 홍익한(洪翼漢)과 함께 삼학사(三學士)로 불린다.
1683년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광주(廣州)의 절현사(節顯祠), 강화의 충렬사(忠烈祠), 평택의 포의사우(褒義祠宇), 홍산의 창렬서원(彰烈書院), 영주의 장암서원(壯巖書院), 고령의 운천서원(雲川書院)
등에 제향(祭享)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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