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 왕유(儒)는 본성이 박씨였는데, 처음에는 태봉국 궁예
때 관직을 올랐으나 궁예의 횡포가 차츰 심해지자 벼슬을 버리고
산 속에서 은거하였다가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자 등용되어 주요
관직을 두루 역임하면서 나라에 공을 세워 태조 왕건이 왕씨로 사성(賜姓)한
것으로 전한다.
다른 문헌에는... . 시조 왕이문(王以文)의 원래 이름은
왕봉강으로 중국(中國) 제남에 살던 왕족이었다. 명나라
의종 때 청(淸)나라가 중국의 판도를 석권하자 협서 안찰사로 있던 왕접이
이에 대항하여 싸우다 영하대전에서 전사하였다. 그러자
청(淸)나라 세조(世祖)가 왕씨를 멸족하려고 1645년(조선 인조 23) 왕봉강을
심양 포로 수용소로 압송하였다. 그때 심양(瀋陽,
지금의 봉천)에 볼모로 잡혀있던
봉림대군(鳳林大君, 조선 17대 왕인 효종)이 그를 만나보고 뜻이 맞아 같이 우리나라에
와서 이문(以文)이란 이름을 하사하고 궁중에서 살았다. 그래서
후손들이 왕이문을 시조로 하고 고향인 제남을 본관으로 하였다. 그후
자손에게 세록를 하사하고 통정대부, 승정원 승지로 추증하였으므로,
후손들은 본관을 제남으로 하여 세계를 이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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