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성 석씨 (月城 昔氏), 경주 석씨
(慶州 昔氏) |
시조(始祖) : 석탈해(昔脫解) - 일세조 : 석재흥(昔載興) |
석씨는 박(朴), 김(金)과 함께 신라(新羅)
56왕중 8명의 왕이 즉위한 신라 3대 왕성 중의 하나이며 시조는 신라 4대 왕 석탈해(脫解)이다. 시조
석탈해(脫解)의 23대손인 석재흥(載興)은 고려 때에 시랑(侍郞)을
지냈으며 후손들이 그를 일세조(一世祖)로 하여 본관을 월성(경주의 옛이름)으로
했다.
"삼국유사" 및 "삼국사기"에
다음과 같은 석탈해(脫解)의 전설이 전한다. 신라 남해왕(南解王)
때에 가락국 바다 가운데에 배가 한 척이 와서 닿았다. 수로왕이 이를
보고 들을 맞이하여 머물게 하려고 했으나, 그배는 나는 듯이 계림동쪽
하서지촌(下西知村)의 아진포(阿珍浦)로 달아났다. 이때 마침 포구에
어부가 배를 끌어 당겨 보니까 까치들이 배 위에 모여들었으며 상자가
하나 있었다. 이상자를 열어보니 단정히 생긴 사내아이 하나와 일곱가지
보석과 노비들이 있었다. 그들을 7일동안 잘 대접했더니 사내아이는
"나는 원래 용성국(龍城國) 사람인데 함달파(含達婆)왕이 오래동안
왕이 없다가 7년만에 커다란 알을 하나낳자 왕과 신하들이 "사람이
알을 낳았으니 좋은일이 아닐것이다"라며 상자에 나와 일곱가지
보석과 노비를 넣어서 배에 실은 뒤 바다에 띄우자 붉은 용이 나타나
배를 호위하여 여기까지 오게된것이오" 라고 하였다. 그 아이가 산위에 올라가 살만한곳을
찾다가 산봉우리에 있는 집을 발견하고 숫돌과 숫을 몰래 그집마당에
묻어 놓고, 다음날 그집으로 찾아가서 이집은 원래 대장간을 하던 우리조상이
살던 집이라며 땅을 파서 대장간 이었던것을 확인시키고 집을 빼앗았다.
그래서 후에 옛날에 남의 집을 내집이라며 빼앗았다 해서 석씨라고 했다고도
하며 鵲(까치 작)의 鳥를 떼어내고 성을 했다고도 한다. 이때 남해왕(南解王)은
석탈해(脫解)가 지혜가있는 사람임을 알고 그를 첫째딸과 결혼을 시켰으며 57년에
왕위에 올랐다. 일설에는 예계(穢系)의 한지방 우두머리가 가락을
거쳐 신라에 들어왔다는 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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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씨(昔氏)는 신라(新羅) 56왕 중 8왕이며
171년간 왕통(王統)을 이었다. 4대 탈해왕(脫解王 : 재위기간
57~80) -
남해왕의 사위 9대 벌휴왕(伐休王 : 재위기간 184~196)
- 탈해왕의 손자 10대 내해왕(奈解王
: 재위기간 169~230) - 벌휴왕의 장손 11대 조분왕(助賁王 : 재위기간
230~247) - 벌휴왕의 손자
12대 첨해왕(沾解王 :
재위기간 247~261) - 조분왕의 동생 14대 유례왕(儒禮王 : 재위기간
284~298) - 조분왕의 장남 15대 기임왕(基臨王 : 재위기간
298~310) - 조분왕의 손자
16대 흘해왕(訖解王 : 재위기간 310~356) - 내해왕의 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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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파(分派), 계파(系派)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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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표적 인물(代表的人物)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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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계 계보도(上契系譜圖)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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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성촌(集姓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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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관지 연혁(本貫地沿革) ] 경상북도
경주(慶州), 경북
경주 월성(月城)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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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항렬표(行列表) ]
38세 |
39세 |
40세 |
41세 |
42세 |
43세 |
44세 |
45세 |
46세 |
기(基) |
진(鎭) |
하(河) |
동(東) |
영(榮) |
규(圭) |
호(鎬) |
준(準) |
식(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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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구(人口) - 경주,
월성 ]
월성 3,748명. (1985년) 경주 7,996명. 월성 1,522명. (2000년 통계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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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련 사이트
] 경주석씨
대종회 (cafe.daum.net/sykp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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