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종3(1652)년 전주류씨 문중(門中)에서 최초로 발간한 임진보(壬辰譜)에는 시조(始祖) 우측(右側)에 방직(邦直)과
운(橒) 두 분을 별도로 기록하여 문화류씨로부터의 분관설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영조2(1726)년 두 번째로 발간한 구병오보(舊丙午譜)에서는 이를 삭제하고, 고종13(1876)년에 네 번째로
발간한 "병자보(丙子譜)"에는 방직(邦直), 운(橒) 두 윗대의 기록은 믿을 바가 못 된다고 고증(考證)을 하여 최초 족보의 "문화류씨
분관설(文化柳氏分貫說)"을 반박하는 "전주류씨보계변증(全州柳氏 譜系辨證)"을 수록하고 있다.
도계공(류심)께서는 족보를 창간할 때 상계(上系)를 실전(失傳)하여 계대(繼代)를 잇지 못하고 완산백 류습(柳濕)을 시조로
하고 방직(邦直), 운(橒) 두 윗대의 기록을 별서(別書)로 한 점을 보면 많은 고심(苦心)을 하신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1924년 갑자보(甲子譜) 편집에 참여한 벽(碧)씨는 남규(南珪)씨가 병자보에 수록한 변증문에 대하여 반론을 제기하는
반증문(反證文)을 갑자보에 수록하였다. 이러한 주장들은 확실한 계대(系代)의 증빙자료 없이 변증(辨證)과 반증(反證)을 하였는데 이 내용만으로는
옳지 않다고 판단된다.
명종17(1562)년에 출간한 문화류씨족보 가정보(嘉靖譜) 서문(序文)에 전주류씨 분관설이 없고, 또한 본문에는 전주류씨
시조(始祖)와 계대(繼代)가 이어지지 않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문화분관설을 확실히 단정 지을 수 없고 또한 토성(土姓)인 전주류씨라고 한다
해도 이 또한 시조 선계(先系)의 계대를 확인할 수 없으니 우리 후손들은 하나의 설로만 믿어야 할 것이다.
이상의 고찰(考察)과 같이 시조(始祖) 이상(以上)의 상계(上系)에 대한 역사적인 사료(史料)가 아직까지는 추가(追加)로
발견된 바 없고 위의 내용들은 우리의 선대(先代)와 타인(他人)의 문헌 속에 단편적으로 기술되어 마땅히 확실한 계대(繼代)를 가늠할 수 있는
근거도 찾을 길이 없다.
따라서 시조(始祖) 완산백(完山伯) 습(濕) 이상의 상계(上系)에 대한 추론(推論)이나 문화분관설 등을 앞으로 각파
종중(宗中)에서 문헌이나 금석문(金石文) 등에 사용하지 않는 지혜(智慧)가 필요할 것으로 판단된다.
그리고 여기서 첨언(添言)할 것은 전주류씨는 3개파가 있다는 것이다. 즉, 일반적으로 알려진 혼(渾), 습(濕), 지(池)를
각각 시조(始祖)로 하는 3개 파이다. 여기서 혼(渾)파는 신라 때 각간(角干)을 지낸 류기휴(柳其休)를 비조(鼻祖)로 하고 혼(渾)을
시조(始祖)로 하여 전주류씨호은공파세보(全州柳氏壺隱公派世譜)를 발간한 바 있다.
2009년 10월 8일 (목) 류기송님이 보내주신자료입니다. [추가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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