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묘(墳墓)
우리민족은 이미 석기시대(石器時代)부터 시체를 매장하는
풍습이 있어 분묘의 형태가 나타났으며, 중국에서는 주(周)나라 때부터
비롯된 것 같다. 분묘의 형태는 신대와 나라·지방 또는 문화상태·계급에
따라 그 양상을 달리하는데, 대체적으로 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에 의거한다.
즉 산을 뒤로 업고 남쪽을 향하며 산의 줄기는 좌로 청룡(靑龍)·우로는
백호(白虎)를 이루고, 앞으로 물이 흐르며 주산(主山)의 약간 높은 부위에
위치하고, 앞은 몇층의 단상(壇狀)을 이루면서 주위에 호석(護石)을
두르고 있는 것이 일반적인 형태이다. 사대부(士大夫)의 무덤 주위에 망주(望柱, 무덤 앞에 세우는
한싸의 돌기둥)를 세우고 석인(石人, 돌로 만든 사람의 형상)을 배치하였으며,
분묘 앞에는 상석(床石, 제물을 놓기 위하여 돌로 만든 상)과 묘표(墓表)를
두고 신도비(神道碑) 또는 묘비(墓碑)·묘갈(墓碣)을 세우는 것이
보통이다. 고려시대에는 불교의 양향으로 화장(火葬)이 성행했으나, 조선시대에는
유교로 말미암아 중을 제외하고는 토장(土葬)을 하여 분묘가 많이 발달하였다. 중국에서는 반드시 부부(夫婦)를 함께 묻었는데 남편은 왼쪽에
아내는 오른쪽에 묻었으며남좌우녀(左男右女), 처녀도 약혼을 했으면
약혼자 무덤에, 약혼을 하지 않은 경우에는 총각과 명혼(冥婚, 저승에서
하는 결혼)을 시켜 합장(合葬)하는데, 우리나라도 이러한 중국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1. 묘소(墓所) 묘소란 분묘(墳墓)의 소재지(所在地)를
말하는 것으로 족보에는 “묘(墓)”자 만을 기록하고, 좌향(坐向, 묘가
위치한 방향, 방위(方位))과 석물(石物) 등이 있을 경우에는 이를 표시(表示)하며
합장의 여부 등도 기록한다. 좌향(坐向)은 대개 ‘○좌(坐)’로
표시하는데 예를 들어, ‘자좌(子坐)’라 하면 자(子)는 정북(正北)을
나타내며 북(北)을 등졌다는 뜻으로, 정남(正南)을 가리키는 것이다. 또
‘좌우(左右)는 사자(死者)를 중심으로 하는 것이므로, 묘를 바라보는
사람의 좌우에는 정반대가 되며 좌는 동(東)·우는 서(西)가 되는
것이다. 「합봉(合封)·합묘(合墓)」는 두 부부를
한 봉분으로 합장(合葬)했다는 말이고, 쌍봉(雙封)은 같은 묘소에 약간
거리를 두고 두 봉분을 나란히 만들었다는 것이다.
2. 묘계(墓界) 묘계는 무덤의 구역으로 품계에
따라 무덤을 중심으로 1품(品)은 사방 100보, 2품은 90보, 3품은 80보,
4품은 70보, 5품은 50보, 생원·진사는 40보 그리고 서민은 사방
10보로 제한하였다.
3. 묘표(墓表) 표석(表石)이라고도 하며 죽은
사람의 관직(官職)이름과 호(號)를 앞면에 새기고, 뒷면에 사적(事蹟)
또는 비석을 세운 날짜와 비석을 세운 자손들의 이름을 새겨 무덤 앞에
세우는 비석이다.
4. 묘지(墓誌) 지석(誌石)이라고도 하며, 천재지변
또는 풍우(風雨)나 오랜 시간이 흐름에 따라 묘를 잃어버리는 것을 대비해,
금속판이나 돌·도판(陶板)에 죽은 사람의 원적(原籍)과 성명(姓名)·생년월일(生年月日)·행적·묘의
위치 등을 새겨서 무덤 앞에 묻는 것이다.
5. 묘비(墓碑)와 비명(碑銘) 무덤 앞에 세우는
비석의 총칭이며, 비명이란 비에 새긴 글로서 명문(銘文)·비문(碑文)이라고도
하는데, 여기에는 고인(故人)의 성명·본관·원적·성행(性行)·경력(經歷)
등의 사적(事蹟)을 서술한 것이다.
6. 신도비(神道碑) 임금이나 고관의 무덤 앞
또는 길목에 세워 죽은 이의 사적(事蹟)을 가리는 비석이다. 대개 무덤
동남쪽에 위치하며 남쪽을 향하여 세우는데, 신도(神道)라는 말은 사자(死者)의
묘로(墓路) 즉 신령(神靈)의 길이라는 뜻이다. 원래
중국 한(漢)나라에서 종2품 이상의 관리들에 한하여 세워진 것으로,
우리나라에서는 고려시대에서 3품이상의 관직자의 묘에 세운 것으로
보이나 현존하는 것은 없으며, 조선시대에 와서 2품이상의 관리들에게
세우는 것을 제도화 하였다. 왕의 신도비로서 건원릉(健元陵)의
태조 신도비와 홍릉(洪陵)의 세종대왕 신도비가 있으며, 문종(文宗)은
왕릉에 신도비를 세우는 것을 금지하여 그 이후에는 왕의 신도비는 세우지
않았다.
7. 묘갈(墓碣) 신도비와 비슷하나 3품이하의
관리들 무덤 앞에 세우는 머리부분이 동그스름한 작은 돌비석으로, 신도비에
비해 그 체재와 규모가 작고 빈약하다. 중국에서는 진(秦)나라에서
비롯됐으며, 당나라에서는 5품이하의 관리들에게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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