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9년(정조 13) 춘당대문과(春塘臺文科)에 장원, 초계문신(抄啓文臣)이 되고, 1795년 경기도도사(京畿道都事) ·수찬(修撰) ·겸문학(兼文學)을 거쳐 예조 ·이조의 참의를 지냈다.
1806년 형조참판으로 우의정 김달순(金達淳)을 탄핵하여 유배시키고, 이조참판을 거쳐 병조 ·이조 ·예조판서를 지냈으며, 1808년 평안도관찰사로 재임 중 병마절도사 이광익(李光益)의 파면을 주청하여 조정에 물의를 일으켰으며, 암행어사 서능보(徐能輔) 탄핵으로 족징(族徵)의 폐해가 심하다 하여 파직, 유배되었으나 모친의 탄원으로 암행어사의 탄핵이 사감(私感)에 따른 것임이 밝혀져 풀려났다. 1810년 형조판서가 되고, 1812년 대사헌으로 박종경(朴宗慶)을 논핵하다가 진도군 금갑도(金甲島)에 유배된 뒤 1819년 풀려났다. 1822년 우참찬(右參贊)으로 제학(提學)을 겸하고, 다음해 대사헌에 재임, 대호군(大護軍)에 이르렀다.
문집에 "일곡집(日谷集)"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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