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 지채문(蔡文, 호는 松谷, 시호는 貞憲)으로
하고 있으나, 그의 선계에 대해서는 고증한 문헌이 실전되어 정확히
상고 할 수 없다. 그는
봉주 사람으로 16세에 문과에 급제, 벼슬이 대제학 지제고에 이르렀다.
1010년(현종 1) 중랑장으로 있을 때 거란병의 침입을 화주(지금의 함흥)에서
격퇴, 강조가 패사한 후에 서경(평양)을 고수하여 공을 세웠다. 이듬해 개경이 함락되고 왕이 나주로 피난할 때 그가 호종한 공으로
밭 30결을 하사받았다. 그 후 우상시가 되어 무관직을 겸하게 되었고,
1026년 우복야에 올랐다. 덕종 때 상장군 좌복야에 추증되고 1등공신에
추록되었다. 그는 고려 초기의 명장으로 "명장록(名將錄)"
'고려편'에
그 이름이 보이고 조선조의 명신 홍언필(洪彦弼)이
김유신(金庾信), 을지문덕(乙支文德),
강감찬(姜邯贊)에 비길 만한 명장이라고 극찬했다.
그래서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고 본관을 봉주로 하였는데 봉주가 봉산으로 개칭됨에
따라 봉산으로 부르기도 하지만 모두 같은 뿌리이다. 시조의 묘소는
황해도 봉산군 와현 거지동에 있었는데 분단으로 인해 근황을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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