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당문학
정공권(鄭公權)의 아들이다. 1382(우왕 8)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춘추관 수찬관이 되고, 사헌
규정(司憲糾正) · 좌정언 · 호조 좌랑 · 병조 좌랑 · 광흥창 사(廣興倉使) 등을 역임하였다. 1392년(조선
태조 1) 사헌부 지평 · 성균관
사예를 거쳐 교주강릉도 안렴 부사(交州江陵道按廉副使) · 대장군이 되었고, 이성계의 추대를 제일 먼저 발의한 공로로 개국공신
1등(開國功臣 一等)에 책록되었으며
문하부 직문하(門下府直門下)를 지내고, 이듬해 대사성으로 승진하였다. 1396년(태조 5) 중추원 우승지로 재임 중에 전년부터 조선과 명나라에 현안문제로
대두된 표전문제(表箋問題)의 표문(表文)을 작성한 인물로 압송되었다. 이때 계품사(計稟使) 하륜(河崙)을 따라 명나라에 가서 사실을 해명하고
돌아왔다. 이어 좌승지를 거쳐 1398년 중추원 부사에 승진하면서 청성군(淸城君)에 봉하여졌다. 1398년(정종 즉위) 제1차 왕자의 난에
이방원(李芳遠)을 도와 정사공신 2등(定社功臣 二等)에 책록되어 곧 첨서중추원사(簽書中樞院事)가 되었다. 이어 예문관 · 춘추관의 대학사 ·
정당문학을 거쳐 지의정부사 · 삼사우사(三司右使)를 역임하였다. 1403년(태종 3) 판한성부사가 되었으며,
1405년(태종 5) 살인죄로 영해로
유배되었으나 공신이어서 곧 사면되었다. 그후 개성 유후사 유후를 거쳐 1408년(태종
8) 태조(太祖)가 승하하자 고부청익사(告訃請謚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 세자 좌빈객, 1411년(태종 11) 참찬의정부사가 되었다.
이듬해 정조사로 다시 명나라에 다녀오고, 1415년(태종 15) 청성부원군(淸城府院君)에
진봉되었으며, 1421년(세종 3) 진하사(進賀使)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우의정에 올랐다. 태종(太宗)의 묘정(廟庭)에 배향(配享)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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