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3년(정조 7)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자여도 찰방을 거쳐 그 후 여러 차례 암행어사로 나갔다. 1801년(순조
1) 교리로 정조사의 서장관이 되어 청나라에 다녀와 장령이 되고 누차
왕명으로 경상우도, 전라도, 충청도를 안렴했다. 그 후 동래부사,
도총부 도총관, 형조참판, 좌승지, 한성부 우윤, 충청도와 경상도의
관찰사 등을 역임하고, 1810년 홍경래(洪景來)의 난이 일어나자 평안도
위무사(平安道 撫使) 겸 감진사(監賑使)로 파견되어 홍경래(洪景來)의 난으로 피폐된 민생을 잘 수습하여
생사당(生祠堂)이 세워졌다. 한성부 판윤, 호조판서를 거쳐, 1818년 동지사로
청나라에 다녀와서 공조, 이조, 병조, 형조의 판서를 역임하고, 1829년
우의정에 올랐다.
관리로서 청백하기로 이름났고 시문에 능했다.
편서에 '관서신미장계(關西辛未狀啓)'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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