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생지나 생몰 연대는 알려져 있지 않다.
고려수절신(高麗守節臣)의 한 사람이다. 고려 말에 형조참의(刑曹參議)를 지냈으나,
조선이 개국한 후에는 고려 왕조에 대한 절개를 지키기 위해 벼슬을 하지 않고 지금의 서울특별시 강동구 고덕동(高德洞)에 은거하면서 자연을 벗하며 학문에 힘썼다고 한다.
어려서부터 태종 이방원(李芳遠)과 친구로 지냈는데, 태종이 즉위한 뒤 한성부윤(漢城府尹)으로 임명하였으나, 벼슬을 받지 않았다. 이후에도 태종이 여러 차례 그의 은거지를 찾았으나, 한결같이 평복 차림에 직접 빚은 술로 대접하면서 벼슬하기를 꺼렸기 때문에 태종도 고려 왕조에 대한 이양중의 뜻을 꺾지 못하였다.
죽은 뒤 고덕동에 묻혔다고 하는데, 기록에는 보이지 않는다.
그가 고려 왕조에 대한 지조를 지키며 숨어 살았기 때문에 그의 뜻을 기려 그가 살던 산을 고지봉(高志峰), 그 마을을 고덕리(高德里)로 부른 데서 오늘의 고덕동이 유래하였다고 한다.
1667년(현종 8) 한양에 구암서원(龜岩書院)이 설립되면서 이 곳에 제향(祭享)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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