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8년(명종 13) 진사가 되고, 1561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정자(正字) ·주서(注書)를 거쳐,
1578년(선조 11) 양주목사(楊州牧使)로 치적을 올렸다. 후에 장령(掌令) ·사성(司成) ·장악원정(掌樂院正) 등을 거쳐
1587년 동래부사(東萊府使)가 되고 대사간 ·승지 ·이조참의를 지냈다.
1592년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임금을 호종, 개성(開城)에서 방어했고, 개성이 함락되자 황해도에서 의병을 모아 활약한 공으로 황해도초토사(黃海道招討使)가 되어 연안(延安)에서 포위된 왜군 3,000여 명을 격파하여 경기도관찰사 겸 순찰사(巡察使)가 되고 병조참판에 승진하였다. 이듬해 전라도관찰사가 되고,
1596년 충청도관찰사로 이몽학의 난(李夢鶴-亂)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웠으나 죄수를 임의로 처벌하여 파직되었다가 황해도관찰사로 기용되어 도순찰사를 겸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재차 황해도초토사로서 연안을 수비하였고, 난이 끝난 후 사퇴하였다. 연안 수비의 공으로 1604년(선조 37) 선무공신
2등(宣武功臣 二等)에 추록되고, 월천부원군(月川府院君)에 추봉되었다,
좌의정에 추증되었다. 연안 현충사(顯忠祠)에 제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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