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1년(공민왕 20) 문과에 급제, 한림수찬(翰林修撰)을 지냈다.
우왕 때 전의부정(典醫副正)으로 탐라(耽羅)에 가서 성주(星主) 고신걸(高臣傑)의 아들 봉례(鳳禮)를 볼모로 데리고 돌아왔는데, 이 때부터 탐라는 고려에 귀순하게 되었다.
1389년(창왕 1) 좌사의대부(左司議1大夫)로 전제(田制)의 폐를 상소했고, 지신사(知申事)가 되어
1390년(공양왕 2) 이초(彛初)의 옥에 연루되어 청주옥에 갇혔으나 수재(水災)로 석방되었다. 그 후 경연참찬관·예문관대제학을 거쳐
1392년 이조판서로서 정몽주(鄭夢周)를 살해한 판전객시사(判典客寺事) 조영규(趙英珪)를 탄핵했다.
같은 해 고려가 망하자 은거하였다.
1393년(태조 2) 이색(李穡)
·정몽주(鄭夢周)에게 이성계(李成桂)를 무서(誣書)한 죄로 울진에 귀양가고 가산을 적몰당했다가 이듬해 풀려났다. 그 후 수차 벼슬을 사퇴하다가
1405년(태종 5) 예문관대제학으로 계품사(啓稟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서 승녕부판사(承寧府判使)·한성부판사(漢城府判使)를 거쳐
1407년 형조판서, 1415년 개성유후사유후(開城留後司留後)가 되었다.
문집으로 "기우자집(騎牛子集)"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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