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세에 학자 정문재(鄭文哉)에게 한학을 배웠다.
1893년(고종 30) 동학(東學)에 입교하여 접주(接主)가 되고
이듬해 해주 팔봉도소접주(八峯都所接主)가 되어 동학혁명을 지휘하다가
일본군에게 쫒겨 1895년 만주로 피신, 김이언(金利彦)의 의병단에 입단했다.
이듬해 귀국, 명성황후(明成皇后)의 원수를 갚는다고 일본장교[중위
쓰치다[土田壤亮]]를 살해, 채포되어 사형이 확정되었으나, 고종의 특사로
감형되었다. 1898년 복역중 탈옥하여 공주 마곡사(麻谷寺)의
승려가 되었다가 이듬해 환속(還俗), 1903년 기독교에 입교했다.
1909년 황해도 안악의 양산학교 교사로 있다가 이듬해 신민회(新民會)에
참가했다.
1911년 '105인 사건'으로 피체, 종신형을 선고받고 복역중에 감형으로
1914년 출옥하여 김홍량(金鴻亮)의 동산평 농장 농감(農監)이 되어 농촌을
계몽하였다.
3·1 운동 후 상하이[상해(上海)]로 망명, 대한민국임시정부
조직에 참여하고 경무국장(警務局長), 내무총장, 국무령(國務領)을 역임하면서
1928년 이시영(李始榮), 이동녕(李東寧)과 한국독립당을
조직, 당수가 되어 이로부터 항일무력활동을 시작, 결사단체인 한인애국단을
조직, 1932년 일본왕 사쿠라다몬[櫻田門] 저격사건, 상하이 훙커우[虹口]공원
일본왕 생일축하식장의 폭탄투척사건 등 이봉창(李奉昌), 윤봉길(尹奉吉)
의사 등의 의거를 지휘하여 60만원의 현상이 붙은 채 일본의 감시망을
뚫고 상해로 탈출, 가흥으로 갔다. 1933년 난징[남경(南京)]에서
장제스[(장개석)蔣介石]을 만나 한국인 무관학교 설치와 대(對)일본전투방책을
협의, 1935년 한국국민당을 조직, 1940년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충칭[重慶]으로
옮길 때 이를 통솔하였고, 한국 광복군 총사령부를 설치, 사령관에 지청천(池靑天)을
임명했다. 1944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에 선임, 1945년
대한민국의 이름으로 일본에 선전포고(對日宣戰布告)를 하는 한편, 광복군
낙하산 부대를 편성하여 훈련을 실시하다가 8.15 해방으로 귀국, 임시정부가
미군정으로부터 정부로서의 정통성을 인정받지 못하였으므로 한국독립당
위원장으로서 모스크바 삼상회의 성명을 반대하여 신탁통치 반대운동[반탁운동]을
전개했다. 대한독립촉성 중앙협의회 부의장, 민주의원
부의장, 민족통일본부 부총재를 역임(이승만(李承晩) ·김규식(金奎植)과
함께 이끌면서 극우파로 활약하였다). 1948년 48년
남한만의 단독 총선거를 실시한다는 국제연합의 결의에 반대하여 통일정부수립을
위한 남북협상을 제창하였다. 그 후 북한으로 들어가 정치회담을 열었으나
실패하였다. 그 후 정부수립에 참가하지 않고 중간파의 거두로
있다가 1949년 6월 26일 경교장(京橋莊)에서 육군 포병 소위 안두희(安斗熙)에게
암살당하였다. 국민장으로 효창공원에 안장,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증장이 수여되었다.
저서로는 "백범일지(白凡逸志)"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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