焚:불사를 분. 書:글 서. 坑:묻을 갱. 儒:선비 유.
책을 불사르고 선비를 산 채로 구덩이에 파묻어 죽인다는 뜻으로,
진(秦)나라 시황제(始皇帝)의 가혹한 법[苛法]과 혹독 한 정치[酷政]을 이르는 말.
[출전]《사기(史記)》〈진시황기(秦始皇紀)〉,《십팔사략(十八史略)》〈진편(秦篇)〉
기원전(BC) 222년, 제(齊)나라를 끝으로 6국을 평정하고 전국 시대를
마감한 진나라 시황제 때의 일이다. 시황제는 천하를 통일하자 주(周)왕조 때의 봉건
제도를 폐지하고 사상 처음으로 중앙집권(中央執權)의 군현제도(郡縣制度)를 채택했다.
군현제를 실시한지 8년이 되는 그 해(BC 213) 어느 날, 시황제가
베푼 함양궁(咸陽宮)의 잔치에서 박사(博士)인 순우월(淳于越)이 '현행 군현 제도하에서는
황실의 무궁한 안녕을 기하 기가 어렵다'며 봉건제도로 개체할 것을 진언했다.
시황제가 신하들에게 순우월의 의견에 대 해 가부를 묻자 군현제의 입안자(立案者)인
승상 이사(李斯)는 이렇게 대답했다. "봉건시대에는 제후들
간에 침략전이 끊이지 않아 천하가 어지러웠으나 이제는 통일되어 안정을 찾았사오며,
법령도 모두 한 곳에서 발령(發令)되고 있나이다. 하오나 옛 책을 배운 사람들 중에는
그것만을 옳게 여겨 새로운 법령이나 정책에 대해서는 비난하는 선비들이 있사옵니다.
하오니 차제에 그러한 선비들을 엄단하심과 아울러 백성들에게 꼭 필요한 의약(醫藥)
, 복서(卜筮), 종수(種樹: 농업)에 관한 책과 진나라 역사서 외에는 모두 수거하여
불태워 없애 버리소서." 시황제가 이사의 진언을 받아들임으로써
관청에 제출된 희귀한 책들이 속속 불태워졌는데 이 일을 가리켜 '분서'라고 한다.
당시는 종이가 발명되기 이전이므로, 책은 모두 글자를 적은 댓조각을
엮어서 만든 죽간(竹簡)이었다. 그래서 한번 잃으면 복원할 수 없는 것도 많았다.
이듬해(BC 212) 아방궁(阿房宮)이 완성되자 시황제는 불로장수의
신선술법(神仙術法)을 닦는 방사(方士)들을 불러들여 후대했다. 그들 중에서도 특히
노생(盧生)과 후생(侯生)을 신임했으나 두 방사는 많은 재물을 사취(詐取)한 뒤 시황제의
부덕(不德)을 비난하며 종적을 감춰 버렸다. 시황제는 진노했다. 그
진노가 채 가시기도 전에 이번에는 시중의 염탐꾼을 감독하는 관리로부터 '폐하를
비방하는 선비들을 잡아 가뒀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시황제의 노여움은 극에 달했다.
엄중히 심문한 결과 연루자는 460명이나 되었다. 시황제는 그들을 모두 산 채로 각각
구덩이에 파묻어 죽였는데 이 일을 가리켜 '갱유'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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