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세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1385년(우왕 11) 문과에 급제, 권지전교시교감(權知典校寺校勘) ·후덕부승(厚德府丞) ·통례문부사 등을 거쳐
1386년 개성부소윤이 되었다. 1392년 조선이 개국하자 금주지사 ·좌보궐 ·영주지사 ·사헌부시사 ·춘주부지사 ·사헌부중승 ·사수감판사를 지냈다.
2번에 걸친 왕자의 난 때 공을 세워 태종이 즉위하자 좌명공신
3등(佐命功臣 三等)에 책록되고 반남군(潘南君)에 봉해졌다. 강원도 도관찰출척사(都觀察黜陟使) ·한성부윤 ·승추부제학(承樞府提學) ·계림윤(鷄林尹) ·전라도관찰사 ·좌군동지총제(左軍同知摠制) ·의정부참지사 겸 대사헌을 거쳐 서북면 도순문찰리사(都巡問察理使) ·의정부지사 ·병조판서 ·대사헌 ·호조판서를 역임한 후 1412년 금천군(錦川君)으로 개봉(改封)되었다. 의금부판사를 겸직하였을 때는 신장(訊杖)의 정수(定數)를 1차에 30으로 정하여 합리적인 형정제도를 시행하였다. 1416년(태종 16) 우의정 겸 수문관대제학에 이어 좌의정 겸 이조판사를 지낸 다음, 금천부원군에 진봉(進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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