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평향교는 함평읍에서 동쪽으로 약 1.5km되는 대동면 향교리에 위치합니다. 함평향교가 현재의 위치로 이건된 것은 1631년이며, 그
이전에는 현재의 함평읍 내교리 외대화에 있었습니다.
함평향교도 다른 향교와 마찬가지로 조선초기에 건립된 것으로 보이는데 건립경위나 내용은 자세히 밝혀지지 않고 있습니다. 다만 내교리 외대화
마을 동쪽산에 향교의 잔해로 보이는 주초석과 기와편들이 남아 있어 그 흔적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곳에 있던 향교는 정유재란 중이던 1597년 9월 왜적에 의해 소실되었습니다.당시의 상황은 함평 유림이자 의병으로 활약했던 노경덕의
행장에서 비교적 소상히 밝혀집니다.
이 행장에는 '왜적의 손에 의해 내교리 외대화 부근에 있던 함평의 향교가 부리던 노복들이 모두 도주해 버리자 자비로 제향을 받들며 자기집
노복들을 교직으로 삼았다.'라 하여 당시 향교의 소실 경위에 대해서 자세히 밝히고 있습니다.
그 후 명맥만 유지하던 함평향교는 1627년 당시 함평현감이던 박정청이 십정지지(十井之地)라 하여 현재의 자리에 터를 잡아 중건하려 했으나
정묘호란으로 중단된 채 방치상태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그 후 1631년 함평 유림 22인의 발의로 대성전을 완공하고 다시 명륜당을 완공하여
향교의 규모를 완전히 갖추었습니다.
이 후 함평향교는 1643년 인근 장성에서 유생 김형복, 김형우 형제가 저지른 유안(儒案)이 불에 타는 사건과 관련하여 향교 이건시
핵심인물이었던 정지현과 통문을 주고받아 전라도 일대에 상당한 파문을 일으킨다.
1662년에는 이황의 위패가 유출되어 물의를 빚는 등 미묘한 사건 속에 빠져들기도 하였습니다. 1816년에는 화재가 발생하여 대성전 일부와
명륜당이 불에 소실되어 다시 중수하는 등 일련의 사건을 겪으면서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향교의 경제력으로는 논 4,300평, 밭 1,515평, 임야 14,327평과 300점의 제기, 20벌의 제복, 27기의 제상을 갖추고
있다.
정기제향은 매년 2회 거행하며 2월의 상정(上丁)과 8월의 상정에 실시한다. 상정이란 매월 1일부터 10일 사이의 간지 중 정(丁)자가
들어간 날을 뜻합니다. 현재의 건물은 1967년 중수한 것으로 대성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이며, 향사제는 대성전 뒷편 좌측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집이며, 명륜당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단층 팔작집으로 되어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