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 목 보물 272호 명 칭 장수향교대성전(長水鄕校大成殿) 분 류 향교 수 량 1동 지정일 1963.01.21
소재지 전북 장수군 장수읍 장수리 254-1 시 대 조선 태종 소유자 향교재단 관리자
향교재단
※ 본문설명
장수향교는 1407년(조선 태종 7)에 덕행이 훌륭한 사람들을 모셔 제사
지내고 지방민의 교육을 위해 나라에서 세운 지방교육기관이다. 지금의 자리로 옮긴 것은 1686년(숙종 12)때의 일이다.
대성전은
공자를 비롯하여 여러 성현께 제사지내기 위한 공간으로 앞면 3칸·옆면 3칸 크기이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이며, 건물의 크기는 별로 크지 않고 앞면 가운데에는 여닫이문을 달았다. 오른쪽과 왼쪽 칸에도 같은 형식의 문짝 1개씩을 달았는데 그
옆에는 우물 정(井)자 모양의 창을 달았다. 지붕 처마를 받치고 있는 장식구조의 겉모양을 화려하게 꾸몄는데, 이러한 장식은 조선 중기 이후
건축의 특징적인 요소이다.
장수 향교는 임진왜란 때에도 잘 보존되어 조선 전기 향교의 형태를 잘 알 수 있다. 이곳에서 보관하고
있는 서적은 지방 향토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으며, 특히 대성전은 조선시대 향교 건축의 대표 건물 중 하나이다.
※ 보충설명
낮은 석축(石築) 기단 위에 세운 맞배집 건축인데, 규모는 별로 크지 않다. 좌우 측면과 뒷면의
벽을 가슴 높이까지를 돌담으로 쌓아 기둥의 아랫몸을 감추어 놓고 있다.
퇴간이 있는 앞면은 중앙에 띠살문의 분합문(分閤門)을
달았고, 좌우 간에는 같은 형식의 문짝 1개씩을, 그리고 그 옆에 정자창(井字窓)을 만들어 놓았으며, 나머지 부분에는 판벽(板壁)을 붙였다.
그러나 인방(引枋) 위로는 좁은 간격으로 벽훤(壁훤)을 세워 회벽(灰壁)을 쳤다.
기둥은 두리기둥을 사용하였는데, 곧고 비교적
가늘다. 공포(공包)는 기둥 위에만 배치되어 있는데, 그 짜임은 다포(多包)집 계통의 포작(包作)이며 이출목(二出目) 구성이다. 쇠서(牛舌)에는
복잡하게 연꽃이 새겨졌고, 윗부분에는 봉머리를 만들어 놓았다. 이러한 장식적인 요소는 조선조(朝鮮朝) 후기의 건축일수록 더욱 두드러지는 경향이
있다. 기둥 위로 공포와 공포 사이의 공간에는 화반(花盤)이 2개씩 배치되어 있다.
처마는 앞면이 겹처마이고 뒷면은 홑처마이며,
좌우의 박공(박공)머리에는 방풍판(防風板)이 달려 있다.
전라북도 장수군 장수읍 장수리에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때에도 불타지 않고 원형 그대로의 모습으로 잘 보존되어 있는 장수 향교가 있습니다. 이 장수
향교는 목조 건물로서 태종 7년에 어명으로 장수읍 선창리에 창건 되었다가 35년 후에 장수읍 장수리로 옮겨진 것입니다.
이 장수
향교는 원 상태 그대로 잘 보존된 향교로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 됐으며, 발포형 건물 구조라는 특수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현재 보물 272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장수 향교가 이렇게 까지 잘 보존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정경손 이라는 향교지기 덕분입니다.
무슨
말이냐구요..? 임진왜란 시 왜군들이 장수 마을까지 들어 왔을 때 관군들은 모두 도망갔으나 향교 지기였던 정경손은 혼자 남아 오성의 위패를
숲속에 숨겨두고 전복을 단정히 입고 않아 이 향교를 불 태우기 전 나를 죽이고 가라~라고 하였답니다
왜군들은 끝내는 향교를
불태우는 일은 그만두었으며 오히려 이 성역에는 누구도 들어가지 말라 라는 신표를 써 붙여 줌으로써 장수 향교가 오늘날 까지 잘 보존될 수 있던
것입니다.
향교 지기였던 정경손이 존경스럽지 않으십니까..? 그래서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정경손 유적비가 세워지게 된
것입니다. 장수 터미널에서 400여m 거리에 위치해 있어서 쉽게 장수 향교를 만나실 수가 있으며, 향교 곳곳에 우리 조상들의 얼과 혼이 깃들어
있음을 한번 느껴보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