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충혜왕 때 강원도 존무사(存撫使)를 역임하였던 안축의 '기문<記文>'에 의하면 문선왕동(文宣王洞)이 옛
학교의 터였음을 전해들은 안축은 그곳을 향교의 건립지로 설정하고, 양양태수로 부임한 정랑 박군(正郞朴君)과 협조하여 향교를 창건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양양 향교는 1626년(인조 4) 학사로서는 협소하여 확장, 중수하였으며,
1682년(숙종 8) 양양 부사 최상익과 진사
최상은, 박호 등의 주도로 임천리에 이건하였다. 이 시기의 양양 향교는 대성전(大成殿) 9칸, 동서(東西) 각 6칸,
신문(神門) 7칸, 전사청(奠祀廳) 3칸, 동서재(東西齋) 각 4칸, 명륜당 14칸, 제기고(祭器庫)
1칸, 서적고(書籍庫) 1칸의 규모를 갖추고 있었으며, 1782년(정조 6) 양양 부사 이진항이 둔전동 주철소<鑄鐵所>를
교궁<校宮>에 두었다. 그러나 1950년에는 한국전쟁으로 소실되어
1952년에 대성전과 동서무, 동서재 등을 중건하고, 다음해
명륜당을 중건하였다. 현재의 대성전은 전면 3칸, 측면 3칸, 동·서무는 전면 3칸, 측면 2칸 규모로 좌우에 배열되었다. 그리고 그 앞으로
동재와 서재가 각각 전면 4칸, 측면 2칸, 제일 전면에는 명륜당이 전면 7칸, 측면 2칸 규모로 배열되었다. 그리고 향교입구 도로변의
하마비<下馬碑>를 지나 향교에 오르는 계단의 우측에 3기의 흥학비와 1기의 거사비가 배열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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