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영광군사(知靈光郡事)를 지낸 남천로(天路)의 아들이다. 1368년(공민왕 17) 현량과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역임한 뒤
공양왕 때 참지문하부사가 되었다.
성품이 곧고 학문을 좋아하며 정몽주(鄭夢周) · 길재(吉再) 등과 교유하였다.
고려 말 정치가 문란하여 지사 사천현(沙川縣, 현 동두천시 상패동)에 은거하였다.
1392년 조선이 개국한 후 태조가 출사를 권유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충절에 감복한 태조가 사천백(沙川伯)으로 봉하고 계속 회유하였으나. 신하된 사람으로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며 감악산(紺岳山)이 감악산에 남아 있다.
영조 때 사천서원(沙川書院)에 제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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