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홍(弘)의 아들이다.
공민왕 때 급제,
여러 내외직을 지내고 순성좌리공신
봉익대부 이조전서 겸 판서운관사에 이르렀다. 그는 당시의 어지러운
정국을 바로잡으려고 누차 주청하였으나 권신 의 농간으로 묵살되었다.
공민왕 때 야수가 성안으로 들어오고 까마귀 떼가 궁중으로 모여들며
샘이 끓고 물고기가 싸운 것을 보고 국가에 변란이 있을 것을 예측하고
천 도할 것을 주달하였으나 도당의 권신에 의해 이루어지지 못하였으므로
치사하고 순천으로 낙향했다. 조선 건국 후에 태조가 누차 불렀으나
불사이군의 충절을 지키기 위 해 나가지 않고 건달산으로 들어가 돈적하니
시인이 그의 충절에 감탄했고 지금도 그 처를 장판서 은신처라고 말한다.
비안의 백천서원에 제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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