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돈령부사 홍낙춘의 아들이다.
1771년(영조 48)
정시문과에 급제, 정자를 거쳐 실서가 되어 당시 사도제자를 죽이는
데 주동역할을 한 벽파들이 세손(正祖(정조))을 해치고자 수차 음모를 꾀하자
이를 막아 세손에게 깊은 신임을 얻었다. 이어 세손의 승명대리를
반대하던 벽파 정후겸(鄭厚謙),
홍인한(洪麟漢), 김귀주(金龜柱) 등을 탄핵,
1776년 정조(正祖)가 즉위하는 데
많은 힘을 썼다. 이어 동부승지에 특진하여 정예병을 별도로 뽑아
숙위대장을 겸직하여 신변이 위험한 정조(正祖)의 보호에 힘쓰고 다시 도승지에
올랐다. 이때부터 모든 상주와 결정이 그의 손을 거쳐 나가게 되어
우리나라 최초의 세도정권이 이룩되었고, 갖은 횡포와 전횡을 일삼아
정후겸과 비슷하다 하여 대후겸을 불렸다. 그가 실각할 때까지 도승지로
대제학·이조참판·대사헌 등을 역임했다. 일설에는
자진해서 물러가라는 정조(正祖)의 권고로 일시 은퇴했다는 3사(司)의
탄핵으로 형벌을 받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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